2020년 2월 6일 목요일

[공유] 너무나 연애하고 싶어서

너무나 목적있는 글들만 난무하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다닐 때 이맘 때에는 다음 학년의 새 교과서들을 받아들고 이런 게 있구나 하면서 특히 국어책을 탐독하면서 재밌어 했었고, 피천득 씨의 "방망이깎던 노인"이었던가를 보면서 왠지 모를 만족감, 그 정도 나이가 되면 나도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부러움이나 동경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도 같습니다.

문득 트위터에서 "간장 종지"로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던 조선일보 한현우 부장의 글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5년전 글이더군요. 새 국어책에서 피천득 수필을 발견한 것과는 약간 다르지만 비슷한 그런 감정을 느껴지게 만드는 글이어서 소개해 봅니다.

조선일보 2015. 12. 26.

[마감날 문득]
대학 4학년 때 학교 후배에게 고백했다. 나, 너 좋아한다. 그녀가 말했다. 알아, 형이 나 좋아하는 거. 아니, 그거 말고. 좋아하는 거 말고. 사랑한다고. 형 왜 그래? 이상해, 형이 그러니까.

그놈의 빌어먹을 형 소리. 아무리 1990년대였지만, 응답해야 마땅한 그 이상한 시대였지만 계집애가 사내놈한테 형이 뭐냐, 라고 말하진 않았다. 오빠도 좋아하기 힘든데 형을 좋아할 수 있겠냐, 하고 속으로 구시렁댔을 뿐이다.

그녀에게 차인 뒤 자취하던 친구 집에 가서 밤새 술을 마셨다. 친구는 소주 세 병 정도 마실 때까지만 상대해주더니 곯아떨어졌다. 안주라곤 자취방 냉장고에 있던 멸치와 김치뿐인데도, 혼자 마시고 또 마시면서 또 간혹 훌쩍거리면서 밤을 새웠다. 연애하고 싶어서, 너무나 연애하고 싶어서 그랬다.

지난번 눈 온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초등학교 6학년 딸이 말했다. 아빠, 제 친구들은 다 연애하거든요. 근데 저는 남자친구가 없어요. 저도 너무 연애를 하고 싶은데, 저를 좋아하는 남자애가 없어요. 그래서, 그래서, 운동장에 나가서 눈을 막 먹었어요.

나는 이와이 슌지를 낳았다. 어쩌면 김남조나 문정희를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달랑 초등학교 6학년인 주제에 너무나 연애하고 싶어서 눈을 막 먹었다는 내 딸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하마터면 그날 결근계를 낼 뻔했다. 얼마나 연애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으면 눈을 막 먹었을까. 내 안의 열이 너무 뜨거워서 그걸 식히려고 눈을 먹었을까. 아니면 비든 눈이든 우박이든 심지어 번개라 할지라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무엇을 한껏 삼켜야 내 안의 텅 빈 구멍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일까.

사랑하기 좋을 때다. 특히 연인이 없어 늘 미열(微熱)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체온이 0.5도씩 상승하는 때다. 집구석에 있지 말고 나가라. 나가서 연애를 하라. 연애 못하겠으면 그냥 헤매라. 헤매다가 운이 좋으면 내리는 눈이라도 한껏 삼키라. 그게 멸치 안주에 소주 마시면서 징징거리는 것보다 오 만배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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