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6일 금요일

[책 소개] 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역시나 하는 일이 같지는 않기 때문에 판사, 검사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는 궁금한 영역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보자마자 YES24에 주문을 했더니 당일배송되어서 바로 다음날 다 읽어버렸네요. 여름휴가기간에 진득히 보아도 괜찮았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고뇌가 배어나오는 내용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 전염되기 때문에 빨리 떼어버린 측면도 있습니다. 형사재판을 하면서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사람들을 매번 보는 판사님들께는 이런 이야기거리가 많겠구나 하면서 읽었습니다. 돌고 돌아 인간을 사랑해야 할 수 있는 사제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판사님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은 제가 메모해 놓은 부분들입니다.


재판기록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파쇄하지만 판결문은 영구 보존되므로, 판결문에 사건의 내용과 양형이유를 상세하게 기재해 그 사안을 항구적으로 알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6면

매에 장사 없고, 가랑비에 옷 젖고, 잔 펀치에 나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그땐 몰랐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9면

개별 사건 판결문이 당사자와 상급심을 상대로 결론의 정당성과 추론의 합리성을 설득하는 과정이라면, 이 책은 과연 나 같은 자들에게 정의를 맡겨도 될지를 판단하기 위한 일종의 참고자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10면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제하는 곳이다. 사랑은 맨 먼저 해체되고, 결국 가정도 해체된다. 형사사건에서는 한 인간의 자유를 지지해준 법적 근거마저 해체시킨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23면

실제 형사법정에 있다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용서와 합의를 무수히 목격한다. 수년간 며느리를 강간한 시아버지를 며느리와 아들이 용서하고, 자신의 어린 딸으 강간한 친구와 합의하고, 친딸을 강간해 임신까지 시킨 계부의 선처를 구하는 어머니조차 그리 드물지 않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24-25면

가정은 사적 영역이므로 공권력 개입은 가급적 자제되어야 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명제는, 그 가정이 가정으로서 최소한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28면

자백은 범행을 진지하게 참회하므로 특별히 양형에 참작하는 면도 있지만, 증인신문 등 증거조사를 생략해 불필요한 공판을 줄여서 판사에게 유무죄 판단의 고통을 줄여주기 때문에라도 유리한 정상이 된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32면

성범죄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인 피해자 진술은 시종일관 면밀히 검토된다. 고소에 이르게 된 경위, 고소의 시점, 최초진술 및 그 이후 여러 진술들과 최종 법정진술 사이에 차이가 있는지, 그 차이가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진술내용이 너무 흔들림이 없어 오히려 작위적인 것은 아닌지, 피고인의 진술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스스로 경험하지 않으면 알기 어려운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 등 피해자 진술 자체의 일관성과 구체성을 먼저 따진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34면

피고인이 범인인든 아니든, 그는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고(설사 거짓말이라고 할지라도) 방어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가급적 흥분하지 않아야 한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39면

누군가 나를 지하철 성추행범으로 지목한다면 결백함을 입증할 수 있을까 상상해 보지만, 나조차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42면

처벌의 필요성을 강조해 기습추행이나 성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부위에 대한 신체접촉 등의 경우에까지 형법상 강제추행으로 포섭하는 것은, 법률해석의 한계를 넘는 것으로 형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에 반하며 이는 입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비판이 있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47면

백무산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놀이동산 대기줄을 길게 하고 급행 티켓을 팔아먹고, 포경을 금지하고 고래고기를 팔아먹고, 유전무죄를 만들어놓고 전관예우를 팔아먹고, 전관예우를 만들어놓고 현직을 팔아먹고, 법을 만들어놓고 탈법을 팔아먹는, 무한 탐욕의 시대에 살고 있다(<주인님이 다녀가셨다>,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2012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54면

판사들이 배석판사가 부장에게 판결 초고를 건네는 것을 '납품한다'고 하고, 재판기일을 '장날'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87면

다른 판사에 비해 능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들리는 순간 머리만 믿고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인생에 치명상을 입는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87면

두꺼운 팔뚝이, 빠른 머리회전이, 성실함이, 튼실한 다리가, 온갖 모멸을 견디는 뚝심만이, 그의 소박한 자본이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90면

소수자에 대한 법적 보호를 시혜라고 보면, 그 시선은 언제나 철회해도 무방한 것이 된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107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는 만 14세 이상 청소년의 경우 검찰이나 법원의 재량에 따라 형사재판을 받을 수도 있고 보호처분을 받을 수도 있는데, 현행 법령은 청소년들의 범죄는 형사처벌보다 보호처분을 통한 교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128면

소년사건은 최종 결정을 변경하는 일이 잦고, 판사가 집행기관의 도움을 받아 보호처분 집행에 깊이 개입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크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129면

증인석을 붙들고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아이의 두 다리를 볼 떄, 유치감으로 들어가려는 아이를 돌려세우곤, 와락 껴안았다 왈칵 등 떠미는 엄마를 볼 떄, 나는 늘 돌아앉았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157면

알츠하이머가 특히 두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는 이의 스러짐 때문만은 아니다. 그이의 기억에 존재하는 나와 우리의 사멸을 함께 천천히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173면

어떤 법관은 법적 안정성이 정의의 영역이라면, 구체적 타당성은 사랑의 영역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195면

칼 포퍼의 지적처럼, 반증가능성 없는 과학은 사이비이고 닫힌 사회가 곧 전체주의듯, 화석화된 판사는 그 자체로 해악이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196면

"아들이 곧 군대를 가는데 몸이 불편한 어머니가 걱정됩니다. 조금 선처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담백하고 건조한, 짧은 의견서였다. '조금'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눈에 걸렸다. 많이도 아니고, 최대한도 아니고, 법이 허용하는 한도 아니고, 조금 선처해달라니. 뻔뻔스럽기보다는 삶을 달관한 듯한 말에서 여느 피고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202면

공식적 사법절차로부터 이타해 사회 내 처우 프로그램에 위탁하는 절차를 다이버전이라 부른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209면

법원에 대한 비난은 언제 들어도 아프지만 그중에서도 과거 간첩조작 등 시국사건에서, 고문당했다는 피고인과 변호인의 주장을 듣고도 재판부가 "바짓가랑이 한번 걷어보라고 하지 않았다"(한홍구, <<사법부>>, 돌베개, 2016)는 글을 읽고 받은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이 글은 그 어떤 비난보다 아픈 회초리였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229면

판사들 사이에서 주취감경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사례, 즉 법정형이 대단히 무거운 사례에서 부당한 양형을 해야 하는 경우에만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을 검토해야 한다고 묵계처럼 통용되어 왔다.

- 박주영, 어떤 양형 이유, 박영사(2019), 2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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