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6일 금요일

[책 소개] 시절일기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이미 소설가 김연수의 글들은 담백하면서도 메세지가 있는, 취향에 맞는 글들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책소개] 소설가의 일 같은 책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이번에 시절일기 라는 책을 새로 냈다는 소개글을 읽고 책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 읽는 데에는 꽤나 시간이 걸렸는데, 슬픈 일은 별로 생각하기 싫어하는 성격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공포영화 나 내용이 슬픈 또는 비극적인 영화는 굳이 보지 않습니다. 천만영화 라고 했던 "기생충"을 지금까지도 제가 보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시절일기의 시절 중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세월호 부분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관련자 아닌 일개 시민이나 소설가나 응어리를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 또한 치유의 과정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런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가라는 사람이 얼마나 넓은 독서폭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언뜻언뜻 보여주는 것도 나름의 재미입니다. 담담하게 가끔은 울컥하면서 읽을 책으로 추천합니다.

"젊을 때는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관점에 의해 내가 누구인지가 상당 부분 결정된다. 이런 현상은 중년까지 계속되는데 그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성이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29면

인간의 몸이란 아무리 길어야 백 년쯤 일렁이다가 절로 사그라드는 불꽃같은 것이고, 제아무리 격렬하다 해도 그 몸에 딸린 감정들 역시 마찬가지다. 고작 백 년만 지나도 오늘의 희로애략을 증언할 입술들은 이 땅에 하나도 남지 않는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72면

1심 재판부는 이준석 선장 등 선원들을 징역 5년에서 징역 36년에 처하면서 침몰원인을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증개축으로 복원성이 약해진 배에, 화물 최대적재량 기준을 어기고 과적해 복원성을 더욱 약화시킨 뒤, 고박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주의해야 할 맹골수도에서 우현으로 대각도 조타를 하는 과실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또한 초기에 구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세월호의 갑판부와 기관부 선원들이 승객의 안전한 퇴선을 위한 조치를 수행하지 않고 먼저 퇴선했으며, 구조에 나선 해경 123정의 정장 김경일 역시 대공 마이크 등으로 퇴선을 유도하지 않았기 대문이라고 판단했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84면

이십 년만의 소감을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이어령 선생의 축사가 귀에 들어왔다. "라틴어에서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입니다."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 역시 부정어 'a'와 망각을 뜻하는 'leteia'의 조합이라고 한다. 진실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이 진실이 되리라.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107면

이십대 초반이니 어김없이 착시가 일어났다. 무엇을 배경으로 놓고 보느냐에 따라 관계의 성격이 달라졌으니까. 이십대 초반에는 외로움을 배경으로 관계를 바라본다. 그러다보니 소원하다는 말은 상대의 반응이 나만큼 친밀하지 앟은 경우를 뜻하기도 했다. 요컨대 이십대 초반에게 관계의 친밀과 소원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125면

바로 그 국가의 자산인 청년의 육체를, 마치 저주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탕진하는 일. 그게 바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참된 주제이니, 정부가 이 소설을 판매금지시킨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130면

누구도 제 삶이 실패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테니, 남에게 들여주는 이야기 속에는 거짓이 살짝 들어가게 마련이다. 픽션은 거기서 시작한다. 그러면서 이 거짓의 틈으로 현실의 민낯을 엿보게 만든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138면

사람person 이라는 단어의 첫번째 뜻이 '가면'이라는 게 역사적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저마다 언제 어디서나 다소 의식적으로 역할을 연기한다는 인식을 가리킨다(...) 우리는 역할을 통해 서로를 안다. 우리 스스로를 아는 것도 역할을 통해서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175면

그리고 한 인간의 서브텍스트는 그의 영혼이 작성하고 있다.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아이러니의 빛을 쪼일 때, 그 영혼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거기에 진짜 이야기가 있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182면

관람객이 화가의 캔버스에서 비시각적인 정보까지 읽어내듯 종이책의 독자들은 한 권의 책에서 비문자적인 요소들까지 읽어낸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235면

그래서 이상 선생의 연애 강좌 제1조는 다음과 같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실화])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255면

'삶을 대담하게 엔조이할 줄 아는 현대인 가운데 먼지낀 샘플처럼 거의 폐물에 가까운 도금한 인간이, 자기만족에 도취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꼴을 아시겠습니까? 선생님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인간의 표본이야요.'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277면

이 지체가 저는 흥미롭습니다. 여기에는 시간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눈으로 봤을 때는 정교한 시계장치와 같이 원인과 결과가 맞물려서 돌아갑니다. 거기에는 지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눈으로 봤을 때 결과의 시간은 지체되거나, 영원이 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은 인과율의 세계, 과학의 세계, 근대성의 세계를 학습하면서도 끊임없이 우연과 신화와 운명의 세계에 매료됩니다.

김연수, 시절일기, 레제(2019), 29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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