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1일 수요일
드라마 '별그대' 표절시비 억대 소송으로 비화
드라마 '별그대' 표절시비 억대 소송으로 비화 법률신문 2014. 5. 20.자 기사
만화 '설희'의 작가 강경옥씨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지난 2월 종용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작가 박지은씨와 HB엔터테인먼트를 상대로 3억원의 지급을 구하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소송을 제기한 당일 제기한 사실이 보도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강경옥씨측에서 소송제기사실을 언론에 알린 것으로 보입니다. 강경옥씨측은 만화 '설희'와 드라마 '별그대'가 줄거리, 주인공의 신체적 특징,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 사건 전개과정 등의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여, 작가 박지은씨 등이 강경옥 작가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강경옥씨는 이미 20년도 전부터 유명한 만화가였습니다. 순정만화를 그리 즐기지 않는 저조차 신일숙 작가의 '아르미안의 네딸들'과 강경옥 작가의 '별빛속에'는 다 보았을 정도이니 강경옥 작가를 우리나라 순정만화계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강경옥 작가로서는 드라마 '별그대'를 자신이 발굴해서 작품화해낸 설정에 약간씩만 변형을 가하여 "동일한 작품의 드라마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자신의 저작물이 표절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 소송에서 중요한 이슈가 될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이디어/표현 이분법'(idea expression dichotomy) 입니다. 하나의 저작물을 구성하는 요소를 아이디어와 표현으로 나누어, 그 중 저작권의 보호는 표현에만 미치고 소재가 되는 아이디어에는 미치지 아니한다는 원칙으로, 미국의 법원에서 저작권침해 소송의 판례를 통하여 발전해 온 법리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저작물의 보호범위를 정하는 기본 원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디어는 보호하지 아니하고 표현만을 보호한다는 명제는 외관상 명쾌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구체적인 사건에서 아이디어와 표현을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저작물에서 아이디어는 표현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에 내재되어 있거나 혼합되어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작물의 어느 부분이 아이디어인지 표현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법원의 역할인데, 우리 법원은 이 두가지를 구별함에 있어 법리적으로 판단하기 보다는 정책적으로 저작권의 보호를 줌으로써 창작의욕을 고취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부분은 표현이라고 하고, 만인 공유의 영역에 두어 누구라도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판단되는 부분에는 이를 아이디어라고 하여 저작권의 보호를 부인하는 것이 실무적 관행입니다.
구체적으로 개념(concept), 문제의 해법(solution), 창작의 도구(building blocks) 등을 포함한 저작자의 사상이나 감정을 아이디어라고 하고, 아이디어를 작품 속에서 구체화하고자 하는 저작자의 노력이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표현이라는 형태로 발현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구별은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케바케 ㅡㅡ), 추상성과 구체성, 독창성과 비독창성, 유일성과 다양성, 소재성과 비소재성 등이 일응의 구별기준이 됩니다.
아이디어와 표현에 관하여 대법원은 "저작권의 보호대상은 학문과 예술에 관하여 사람의 정신적 노력에 이하여 얻어진 사상 또는 감정을 말, 문자, 음, 색 등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외부에 표현한 창작적 표현형식이고, 표현되어 있는 내용, 즉 아이디어나 이론 등의 사상 및 감정 그 자체는 설사 그것이 독창성, 신규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저작권의 보호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므로, 저작권의 침해여부를 가리기 위하여 두 저작물 사이에 실질적인 유사성이 있는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도 창작적인 표현형식에 해당하는 것만을 가지고 대비하여야 할 것이며, 소설 등에 있어서 추상적인 인물의 유형 혹은 어떤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전형적으로 수반되는 사건이나 배경 등은 아이디어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저작권법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대법원 2000. 10. 24. 선고 99다10813 판결, 일명 '까레이스키 사건'). 지난 번 [책소개] 비명을 찾아서 포스팅에서 잠깐 언급했었는데, 복거일 작가가 2009로스트메모리즈라는 영화의 제작사에게 저작권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영화가 따온 것은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의 아이디어이지 표현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한 것도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설희'라는 작품도 심지어 '별그대'도 드라마 전체를 다 본 것이 아니라서 섣불리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것 같기는 하나, 강경옥 작가측이 드라마 별그대의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가져다 쓴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이 아이디어가 아니라 구체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 이 소송 승패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귀추가 주목되는 사건입니다.
* 참고 : 오승종, 저작권법 3판, 박영사(2013), 73-84면(이 글의 네번째 단락부터 여섯번째 단락까지는 위 책 중 주요부분을 발췌/수정인용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2014년 5월 8일 목요일
[책 소개] 비명을 찾아서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 문학과 지성사
어린이날, 부처님 오신날이 낀 연휴였는데, 특별히 준비성이 뛰어나지 않은 턱에 연휴에 놀러갈 계획을 잡아놓지 않아서 나들이 없이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골라잡은 책은 고종석 선생님이 스승이라고 하시는 복거일 씨의 초기 소설이었습니다. 원체 들어본 적은 많았으나, 그 제목이 우울해 보인다는 이유로, 폭망한 2009로스트메모리즈 라는 영화(장동건 주연)의 원작 소설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서 '영화가 망했는데 소설이라고 다르겠어?'라는 생각에, 1987년에 나온 소설을 굳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장편소설 치고는 그닥 두껍지 않은 분량, 고종석 선생님에게 영향을 미쳤고 영어공용화론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복거일이라는 분에 대한 뒤늦은 호기심으로 연휴 내내 오랜만에 책읽는 즐거움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제 감상평은 꽤나 괜찮은 소설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미 20년도 넘은 소설의 내용이 지금 읽어도 별로 오래된 것 같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점이 매우 놀랍습니다. 그 아이디어를 따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는 2009로스트메모리즈(복거일씨는 당시 이 영화사를 상대로 아이디어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였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를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장르로 보아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도 액션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그와 달리 주인공은 약간 비범한 정도의 알루미늄 생산회사 유부남 과장으로 직속 후배에게 연정을 품지만 끝내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머릿속으로 생각이 엄청 많은 시인에 불과합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실패하여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중국 일부까지 차지하면서 둘로 쪼개진 중국과 접경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말글을 잃어버린지 40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하는 주인공이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 모험을 떠나려는 찰라에 소설이 끝나고 말죠.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이 정부로부터 합작투자 인허가를 받아내는 과정입니다. 로펌에 다닐 때 제가 했던 업무 중 외국환거래법상 기재부나 한국은행으로부터 인허가를 받는 것과 80년대와 2000년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복거일씨가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의 직업상 정부 부처 공무원들에게 인허가를 받는 일이 꽤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또한 일제에 병합된 조선을 이야기하면서도 내지에서 쿠데타가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때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경험한 작가가 이를 비틀어 묘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하지만 작가가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우리 말글이 없어진 상태, 일제가 도서관에서 한글로 된 사전과 역사서도 모두 없애 버려 자료도 거의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말글의 맥을 다시 찾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 될 것인지 였습니다. 역사와 언어, 특히 일어와 우리 말에(업무의 내용상 다루어야 하는 영어까지)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소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각 장을 가상의 소설이나 법령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거기에 맘에 드는 몇 구절을 옮겨 봅니다. 그 아이디어의 참신성을 비롯해 꽤나 흥미로운 점이 많은 소설로, 아직 안 읽으셨다면 한번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관료계급은 자신을 집권 계급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만듦으로서 연명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으로 모호하며, 집권자가 누구인가 따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적국에 정복되면, 새 주인을 옛 주인을 섬겼던 것과 같은 충성심으로 섬긴다. 그들은 통치권력을 충성스럽게 섬김으로써 인민들 위에 군림하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한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경성, 쇼우와 62년(상), 문학과 지성사, 296-297면.
군사독재정권이 국내의 모든 반대자들을 힘으로 쉽사리 누를 수 있기 때문에 영속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정권 아래서 이득을 보는 자들의 기원에 지나지 않는다. 독재정권을 안정시키는 경직된 사회구조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결정적 약점을 안고 있다. 내부적으로 강력하고 안정된 듯이 보이는 정권들이 외부의 압력에 허망하도록 쉽사리 굴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양 열국의 개국요구 앞에 허둥대다가 무너진 도꾸가와 막부 정권이 그 좋은 예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상), 문학과 지성사, 322면.
정당하게 성립되지 않은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정권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도적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이다. 정치, 즉 권력의 배분행위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원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차원에서 도덕적 질서가 이루어지길 바라겠는가?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상), 문학과지성사, 329면.
국가라는 배가 위기를 만나면, 국민들은 굳은 손길로 키를 잡을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배가 가야 할 목적지나 항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국민들은 전제적 통제가 분분한 논란들을 종식시키고 그럭저럭 배를 조종해서 험한 물결을 해져나가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옳은 항로를 발견하는 일은 굳은 손길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하), 문학과지성사, 100면.
2014년 4월 3일 목요일
[책 소개] 감염된 언어
고종석, 감염된 언어, 개마고원(2007)
요즈음 부쩍 고종석 선생님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글들 중 많은 부분이 1990년대 후반에 씌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0년대 후반은 제 학부 3-4학년 때였는데 그 당 시에 저 는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하고 정신없을 시기이기도 하였으려니와 그 때 위 책에 실려 있던 글들을 탐독하기에는 아직 생각이 여물지 않았을 것이어서 차라리 지금 저 책을 접한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글, 한국어, 한자, 일본어, 번역과 같은 우리 말글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개념의 뭉치들을 이처럼 쉽게 풀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자가 한국어, 한자, 일본어, 프랑스어와 같은 언어를 상당히 능란하게 사용해본 경험이 있고, 그 언어들의 차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글들을 설득력있게 쓸 수 없었을 것이구요. 아울러 2000년대 초반 조선일보에서 소개되었던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에 대해서 당시 저는 복거일씨에게는 죄송하게도 "저런 생각을 무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다니 *** 아니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에 우리 사회에서 정보습득의 도구로서 영어가 차지하는 위치를 몸으로 접해보고 나서야 새삼 그 의견에 대해서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0-80년대를 지나쳐 왔던 사람에게 내면화되어 있던 반공주의, 자유주의, 개인주 에 대해서 젊은 시절부터 느꼈던 수치심으로부터의 해방이 고종석의 한국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제게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입니다. 더불어 고종석 선생님이 스승으로 생각하시는 저에게는 로스트메모리스라는 폭망한 한국영화의 원작인 "묘비를 찾아서"의 원작자로 더 기억되는 복거일의 저작들을 한번 살펴보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는 점을 부기해 두고자 합니다.
다음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구절들 입니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 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 -30면.
그러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한국인이라면 제 언어를 가리킬 때도 (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라고 부를 것이다. -79면.
일반적으로 한 언어와 한 문자체계의 결합이 필연적인 경우는 없다. 터키어는 오래도록 아랍문자로 적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에 공화제가 들어서면서 로마문자로 적기 시작했고, 오래도록 한자로 적었던 베트남어 역시 지금은 로마문자로 적고 있다. -82-83면.
한국어 텍스트가 오로지 한글로 표기된다고 하더라도, 그 한글의 외피 상당수 안에는 한자의 속옷이 있고, 이 속옷의 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한 한국어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88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우리 사회에 수두록하지만, 그들 가운데 민중주의나 파시즘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드물다. 그 드문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유주의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천착한 것은 복거일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된 사정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분위기가 아주 억압적이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겠지만, 바로 그 점이 복거일의 지적 독립성을 돋보이게 한다. -108면.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때때로 반민주주의자다. 나는 복거일의 글에서 이따금씩 보이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곤혹스럽다. -110-111면.
일본인들의 위대함은 유럽문화의 전지구화를 마무리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게걸스럽게 흡수하면서도 한자라는 동아시아 문명의 공통 유산 속에 완전히 녹여버렸다는 데에 있다. -125면.
공용어로서의 영어를 반대한다는 뜻은, 지식과 정보를 특정집단이 독점하는 걸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라틴어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의 엘리트들이 지식을 독점했듯이 말이다. 지식과 정보는 곧 권력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206면.
복거일은 어느 자리에서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함으로써 자신이 태어난 세상의 철학적 틀 속에 갇히는 것이 모든 종교적 지식체계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208면.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오오사카를 오오사카로 부르고, 타나카를 타나카로 불러야 한다. 타나카를 '전중'으로 불러야 한다면, 철학자 화이트헤드를 우리는 '백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235면.
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유럽의 한국인 학자예술가들을 간첩으로 몰아 조작한 사건을 사람들은 '동베를린 사건'으로보다 '동백림 사건'으로 더 기억하고 있다.-25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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