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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월 17일 목요일

제헌절


제헌절이 공휴일에서 제외된지 7년이 되었다고 합니다(관련기사). 헌법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 인터넷에서 종종 보이네요. 제헌절과 관련해서 "헌법이 제정된 날"이라는 간단한 의미 외에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하는 책이 있어 그 부분을 따와 봅니다. 고종석 작가의 "히스토리아" 라는 책인데, 1년 365일 하루하루 마다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작가 맘대로 뽑아서 만든 책입니다. 7월 17일은 "제헌절"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7월 17일 제헌절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됐다. 제헌헌법은 대통령 중심제에 의원내각제 요소를 가미했다. 대통령을 국회에서 뽑도록 한 것이 그 예다.
헌법은 한 나라의 최고 기본법이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그 해 10월 27일 개정공포된 헌행헌법은 전문으로 시작되 총강, 국민의 권리의무, 국회, 정부, 법원, 헌법재판소, 선거관리, 지방자치, 경제, 헌법개정 등 본문 10장 130조와 부칙 6조로 이뤄져 있다. 대한민국 헌법은 반세기 동안 무려 12차의 개헌안이 제출돼 9차례나 고쳐지는 굴곡의 역사를 겪었다. 그래서 냉소적인 사람들은 우리 헌법을 "누더기 헌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헌은 최고 권력자의 장기 집권 욕심과 이에 맞서는 시민혁명의 결과로 이뤄졌다.
대통령부통령을 직선하기로 한 1952년의 제1차 개헌(발췌 개헌)과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폐지한 1954년의 제2차 개헌(사사오입 개헌)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영구 집권 욕망과 관련돼 있다. 의원내각제를 규정한 1960년의 제3차 개헌과 반민주 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한 소급입법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부칙을 마련한 그 해 11월의 4차 개헌은 419혁명의 결과다. 대통령제로 회귀한 1962년의 제5차 개헌과 대통령의 연임을 3기까지 연장한 1968년 제6차 개헌, 통일주최국민회의가 대통령을 뽑도록 한 1972년의 제7차 개헌은 박정희의 쿠데타와 영구 집권 획책의 결과다.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의 간접 선고와 7년 단임제를 규정한 1980년의 제8차 개헌은 전두환이 이끈 쿠데타의 산물이다.
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오래도록 이 선언의 배반을 경험해 왔다.

- 고종석, 히스토리아, 마음산책(2003), 215면

약간의 사족을 달자면, 우리 제헌헌법에 대통령중심제에 의원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원인이 이승만의 욕심 때문이라는 가열찬 비판은 허핑턴포스트의 [제헌절만큼 기구했던 첫 헌법의 운명]을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7차 개헌 관련하여 대통령을 뽑는 기구는 통일주최국민회의가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인데, 히스토리아의 해당 부분에 오타가 난 것으로 보입니다.

2014년 5월 8일 목요일

[책 소개] 비명을 찾아서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 문학과 지성사

어린이날, 부처님 오신날이 낀 연휴였는데, 특별히 준비성이 뛰어나지 않은 턱에 연휴에 놀러갈 계획을 잡아놓지 않아서 나들이 없이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골라잡은 책은 고종석 선생님이 스승이라고 하시는 복거일 씨의 초기 소설이었습니다. 원체 들어본 적은 많았으나, 그 제목이 우울해 보인다는 이유로, 폭망한 2009로스트메모리즈 라는 영화(장동건 주연)의 원작 소설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서 '영화가 망했는데 소설이라고 다르겠어?'라는 생각에, 1987년에 나온 소설을 굳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장편소설 치고는 그닥 두껍지 않은 분량, 고종석 선생님에게 영향을 미쳤고 영어공용화론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복거일이라는 분에 대한 뒤늦은 호기심으로 연휴 내내 오랜만에 책읽는 즐거움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제 감상평은 꽤나 괜찮은 소설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미 20년도 넘은 소설의 내용이 지금 읽어도 별로 오래된 것 같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점이 매우 놀랍습니다. 그 아이디어를 따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는 2009로스트메모리즈(복거일씨는 당시 이 영화사를 상대로 아이디어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였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를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장르로 보아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도 액션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그와 달리 주인공은 약간 비범한 정도의 알루미늄 생산회사 유부남 과장으로 직속 후배에게 연정을 품지만 끝내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머릿속으로 생각이 엄청 많은 시인에 불과합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실패하여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중국 일부까지 차지하면서 둘로 쪼개진 중국과 접경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말글을 잃어버린지 40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하는 주인공이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 모험을 떠나려는 찰라에 소설이 끝나고 말죠.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이 정부로부터 합작투자 인허가를 받아내는 과정입니다. 로펌에 다닐 때 제가 했던 업무 중 외국환거래법상 기재부나 한국은행으로부터 인허가를 받는 것과 80년대와 2000년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복거일씨가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의 직업상 정부 부처 공무원들에게 인허가를 받는 일이 꽤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또한 일제에 병합된 조선을 이야기하면서도 내지에서 쿠데타가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때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경험한 작가가 이를 비틀어 묘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하지만 작가가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우리 말글이 없어진 상태, 일제가 도서관에서 한글로 된 사전과 역사서도 모두 없애 버려 자료도 거의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말글의 맥을 다시 찾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 될 것인지 였습니다. 역사와 언어, 특히 일어와 우리 말에(업무의 내용상 다루어야 하는 영어까지)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소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각 장을 가상의 소설이나 법령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거기에 맘에 드는 몇 구절을 옮겨 봅니다. 그 아이디어의 참신성을 비롯해 꽤나 흥미로운 점이 많은 소설로, 아직 안 읽으셨다면 한번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관료계급은 자신을 집권 계급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만듦으로서 연명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으로 모호하며, 집권자가 누구인가 따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적국에 정복되면, 새 주인을 옛 주인을 섬겼던 것과 같은 충성심으로 섬긴다. 그들은 통치권력을 충성스럽게 섬김으로써 인민들 위에 군림하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한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경성, 쇼우와 62년(상), 문학과 지성사, 296-297면.

군사독재정권이 국내의 모든 반대자들을 힘으로 쉽사리 누를 수 있기 때문에 영속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정권 아래서 이득을 보는 자들의 기원에 지나지 않는다. 독재정권을 안정시키는 경직된 사회구조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결정적 약점을 안고 있다. 내부적으로 강력하고 안정된 듯이 보이는 정권들이 외부의 압력에 허망하도록 쉽사리 굴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양 열국의 개국요구 앞에 허둥대다가 무너진 도꾸가와 막부 정권이 그 좋은 예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상), 문학과 지성사, 322면.

정당하게 성립되지 않은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정권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도적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이다. 정치, 즉 권력의 배분행위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원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차원에서 도덕적 질서가 이루어지길 바라겠는가?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상), 문학과지성사, 329면.

국가라는 배가 위기를 만나면, 국민들은 굳은 손길로 키를 잡을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배가 가야 할 목적지나 항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국민들은 전제적 통제가 분분한 논란들을 종식시키고 그럭저럭 배를 조종해서 험한 물결을 해져나가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옳은 항로를 발견하는 일은 굳은 손길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하), 문학과지성사, 100면.


2014년 4월 3일 목요일

[책 소개] 감염된 언어



고종석, 감염된 언어, 개마고원(2007)

요즈음 부쩍 고종석 선생님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글들 중 많은 부분이 1990년대 후반에 씌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0년대 후반은 제 학부 3-4학년 때였는데 그 당 시에 저 는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하고 정신없을 시기이기도 하였으려니와 그 때 위 책에 실려 있던 글들을 탐독하기에는 아직 생각이 여물지 않았을 것이어서 차라리 지금 저 책을 접한게 다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글, 한국어, 한자, 일본어, 번역과 같은 우리 말글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개념의 뭉치들을 이처럼 쉽게 풀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저자가 한국어, 한자, 일본어, 프랑스어와 같은 언어를 상당히 능란하게 사용해본 경험이 있고, 그 언어들의 차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면 결코 이런 글들을 설득력있게 쓸 수 없었을 것이구요. 아울러 2000년대 초반 조선일보에서 소개되었던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에 대해서 당시 저는 복거일씨에게는 죄송하게도 "저런 생각을 무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다니 *** 아니야?"라고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난 뒤에 우리 사회에서 정보습득의 도구로서 영어가 차지하는 위치를 몸으로 접해보고 나서야 새삼 그 의견에 대해서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0-80년대를 지나쳐 왔던 사람에게 내면화되어 있던 반공주의, 자유주의, 개인주 에 대해서 젊은 시절부터 느꼈던 수치심으로부터의 해방이 고종석의 한국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위치를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제게 이 책의 가장 큰 수확입니다. 더불어 고종석 선생님이 스승으로 생각하시는 저에게는 로스트메모리스라는 폭망한 한국영화의 원작인 "묘비를 찾아서"의 원작자로 더 기억되는 복거일의 저작들을 한번 살펴보아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는 점을 부기해 두고자 합니다.

다음은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구절들 입니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 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 -30면.

그러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한국인이라면 제 언어를 가리킬 때도 (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라고 부를 것이다. -79면.

일반적으로 한 언어와 한 문자체계의 결합이 필연적인 경우는 없다. 터키어는 오래도록 아랍문자로 적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키에 공화제가 들어서면서 로마문자로 적기 시작했고, 오래도록 한자로 적었던 베트남어 역시 지금은 로마문자로 적고 있다. -82-83면.

한국어 텍스트가 오로지 한글로 표기된다고 하더라도, 그 한글의 외피 상당수 안에는 한자의 속옷이 있고, 이 속옷의 질감을 느끼지 못하는 한 한국어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88면.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인들은 우리 사회에 수두록하지만, 그들 가운데 민중주의나 파시즘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드물다. 그 드문 사람들 가운데서도, 자유주의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천착한 것은 복거일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된 사정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분위기가 아주 억압적이었다는 데 그 이유가 있겠지만, 바로 그 점이 복거일의 지적 독립성을 돋보이게 한다. -108면.

내가 이해하는 자유주의자는 만인이 파시즘을 옹호하고, 만인이 볼셰비즘을 지지해도 이를 수락하지 않는 정신의 이름이다. 그 자유주의자는 비판을 통해서,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폭력에 호소해서라도 전체주의를 분쇄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옹호하지만, 그 사상의 자유시장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대해서만은 너그러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는 때때로 반민주주의자다. 나는 복거일의 글에서 이따금씩 보이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곤혹스럽다. -110-111면.

일본인들의 위대함은 유럽문화의 전지구화를 마무리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게걸스럽게 흡수하면서도 한자라는 동아시아 문명의 공통 유산 속에 완전히 녹여버렸다는 데에 있다. -125면.

공용어로서의 영어를 반대한다는 뜻은, 지식과 정보를 특정집단이 독점하는 걸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라틴어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중세의 엘리트들이 지식을 독점했듯이 말이다. 지식과 정보는 곧 권력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206면.

복거일은 어느 자리에서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함으로써 자신이 태어난 세상의 철학적 틀 속에 갇히는 것이 모든 종교적 지식체계의 운명"이라고 말했다. -208면.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오오사카를 오오사카로 부르고, 타나카를 타나카로 불러야 한다. 타나카를 '전중'으로 불러야 한다면, 철학자 화이트헤드를 우리는 '백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235면.

60년대에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유럽의 한국인 학자예술가들을 간첩으로 몰아 조작한 사건을 사람들은 '동베를린 사건'으로보다 '동백림 사건'으로 더 기억하고 있다.-255면.

2014년 3월 18일 화요일

[책소개] 빠리의 기자들



고종석, 빠리의 기자들, 새움(2014)

기자 고종석이 소설가 고종석으로서 낸 첫번째 소설인 [기자들]을 수정하여 [빠리의 기자들]이란 제목으로 다시 펴냈습니다. 아무래도 저자의 첫번째 외국체류의 경험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고 그 기대대로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기자들과의 에피소드, 고종석 기자가 유럽에 나가서 취재활동을 하면서 [유럽]지에 실은 기사들, 동독의 붕괴이후 동독지역 지식인과의 인터뷰 등을 소설의 형식 안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법학도였다는 것을 아는 저로서는 저자가 법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타내는 부분이 나와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음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 때 나는 인과적 행위론이니, 목적적 행위론이니, 사회적 행위론이니, 미필적 고의니, 인식있는 과실이니,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니 하는 잡스러운 개념들로 가득 찬 형법 교과서를 생각했고..."

-고종석, 빠리의 기자들, 새움(2014), 158면.

법학을 공부하고 법조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두가지 진입장벽으로 종종 "한자"가 섞여 있는 법조문과 법서들 자체와, 형법의 수많은 행위론들을 들 수 있었습니다. 십년전만 해도 법서에 있는 한자들은 이공계의 수많은 두뇌들이 사법시험을 쳐다보지 않게 하는 진입장벽이 되었었는데, 어느 순간 법서에서 한자들이 괄호 안에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한자가 그 용어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아니면 쓰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서 마침내 의사출신, 공학박사 출신 변호사를 주위에서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쨌든 언어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저자가 법학을 공부하는데 사실 한자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형법의 행위론이나 개념들인데, 이게 실제로 누가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판단하는 데에는 전혀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형법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이유로 문제로 출제되고 그것이 당락을 좌우하는 지라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저자는 이를 "잡스러운 개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잡스러운 개념이 무엇인지 간단히나마 알아보고 저자의 심정을 이해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단 개념들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왜 행위론이 문제가 되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형법은 범죄를 다루는 학문이고, 범죄는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위법하고 유책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범죄는 행위의 존재를 요건으로 합니다. 형법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로서 범죄의 모든 발생형태에 보편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행위개념은 가능한가, 이러한 행위개념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해야 하는가 또는 규범적으로 파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행위론 이라고 합니다.  행위론은 형법적 의미에서 행위와 비행위를 구별하여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 거동을 제외하는 기능(한계기능), 형법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의 행위를 통일개념으로 파악하게 하는 기능(분류기능), 행위-구성요건해당성-위법성-책임-형벌로 이어지는 형법체계를 구성하는  기능(결합기능)을 합니다.

인과적 행위론은 행위를 의사에 의하여 외부세계에 야기된 순수한 인과과정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인과적 행위론에 따르면 행위를 일정한 거동의 유의성으로 보게 되므로, 행위개념에 부작위를 포함시킬 수 없게 되고, 미수행위의 개념결정에 난점을 보이는 등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목적적 행위론은 행위를 본질적으로 목적활동성의 작용으로 봅니다. 그러나 목적적 행위론은 고의를 설명하는 데 뛰어나지만 과실행위나 부작위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사회적 행위론은 인과적 행위론과 목적적 행위론이 존재론적 방법만으로 행위를 파악하려고 하였다면 여기에 규범적인 방법으로 행위를 규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도 학자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슈미트의 사회적 행위론, 객관적 사회적 행위론, 주관적 사회적 행위론 등으로 나뉘어 설명됩니다.

미필적 고의는  구성요건적 결과에 대한 인식 또는 예견이 불명확한 경우 중 결과의 발생 자체가 불확실한 경우를 말합니다. 즉, 행위자가 구성요건적 결과의 발생을 확실하게 인식한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예견하고 행위한 경우를 말합니다.

미필적 고의는 인식있는 과실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가 문제되는데, 미필적 고의는 말 그대로 "고의"인 만큼 미필적 고의를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범죄의 "고의범"으로 처벌되지만, 인식있는 과실을 가지고 범죄의 결과를 발생시킨 사람은 그 구성요건이 "고의범"만 처벌하고 있으면 처벌되지 않고, "과실범"을 처벌하고 있는 경우에 한하여 과실범으로 처벌되기 때문입니다.

그 구별기준과 관련하여 개연성설, 가능성설, 용인설, 감수설 등이 주장되고 있는데, 감수설에 따르면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를 진지하게 고려하였을 뿐 아니라 구성요건 실현의 위험을 감수한 경우에는 미필적 고의이고, 이에 반하여 행위자가 구성요건적 결과발생을 회피할 수 있다고 신뢰한 경우가 인식있는 과실이라는 것입니다.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는 행위자가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하여 자기를 심신장애의 상태에 빠지게 한 후 이러한 상태에서 범죄를 실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불법의 실행은 책임무능력 상태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결정적 원인이 책임능력상태에서 행위자에 의하여 자유롭게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책임무능력 상태의 행위라도 처벌되고, 형이 감경되지 않게 됩니다.

사실 형법을 공부할 때 위와 같은 개념 하나 하나에 천착하게 되면 수많은 개념에 질식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독일의 형법과 범죄 관련 이론이 수입되면서 체계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리고 번역투의 문구는 일반인에게 너무도 생소해서 당연히 "잡스럽"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 문제가 되는 사안에서 위와 같은 개념이 도움이 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듭니다. 어쩌면 위의 이론들은 실무가 또는 학자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장난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개념들이 행위-구성요건해당성-위법성-책임-형벌이라는 형법의 체계를 이루는 토대가 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잡스러움을 뚫고 형법에 발을 들여놓고 마침내 실무가나 학자가 된 많은 분들을 위한 한마디 변명이었습니다.

참고 : 이재상, 형법총론, 박영사(2008)



2014년 3월 11일 화요일

파워 트위터리언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다보면 "트위터에서 누가 어떤 말을 했는데 그것이 이슈를 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 트위터를 하는 분을 주위에서 찾아보면 손에 꼽을 정도 밖에는 안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트위터와 트위터에서 이슈를 일으키는 "파워트위터리언"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트위터(트위터 홈페이지)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국에서 시작된 "미니 블로깅 서비스"입니다. 즉, 블로그를 축소시키면서 하나의 포스팅에 담을 수 있는 양이 제한되는 대신 공유, 확산기능이 훨씬 보강된 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트위터의 개별 포스팅을 "트윗"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지저귀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일상에서 생각나는 사건, 사고, 생각, 잡담 등을 짧게 짧게 지저귀듯 올려서 다른 사람이 보게 만드는 것이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입니다.


인터넷을 데스크탑이나 노트북에서 쓸 때에는 트위터의 파괴력을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을 때 트위터는 가장 빠른 사건의 보고자로서, 소위 "폭풍알티"로 소식을 파급시키는 데 어떠한 매체보다 적합하다는 것이 알려지고 사용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또 주요한 명사들이 트위터에 글을 남길 때 이를 자신의 스마트폰에서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은 10대에게도 이를 사용케 하는 유인이 되었습니다. 이외에도 트위터의 짧은 글들에서 자신만의 "촌철살인" 멘트를 날림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트윗을 구독하게 만드는 트위터리언(또는 트위터러)이 생겼습니다. 물론 이들은 트위터를 사용하기 이전에서 셀리브리티였던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트위터를 함으로써 그 영향력은 더 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트위터의 사용방식을 설명하자면, 일단 트위터에 가입하면 트위터는 자신의 계정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계정에서 140자 한도 내의 트윗을 자유롭게 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정만 만든 상태에서는 그 트윗을 아무도 보지 못합니다(물론 인터넷에서 트윗의 내용이나 계정을 검색하여 팔로워가 아무도 없는 사람의 트윗을 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것은 트위터가 "마이크로 블로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올린 트윗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계정을 "팔로우(follow)"한 팔로워(follower, 즉 나의 계정을 구독하는 사람들)들 뿐입니다.


 팔로우는 "구독"이라는 개념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어떠한 계정을 팔로우하면, 팔로우한 이후에 그 계정의 트윗은 자신의 트위터에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팔로우한 계정이 늘어나면 그 계정들의 트윗들이 자신의 트위터의 화면에서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래서 트위터의 이 화면을 "타임라인(timeline)"이라고 부릅니다.


타임라인에서 좋은 글을 발견했을 때 이 글을 자신의 팔로워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기능이 "리트윗(Retweet)"입니다. 줄여서 "RT(알티)"라고도 합니다. 즉, 내 계정은 A계정의 팔로워이고, B 계정은 내 계정의 팔로워일 뿐 A계정의 팔로워가 아닌 상태라도 내 계정이 A계정의 트윗을 리트윗하게 되면, B계정은 A계정의 팔로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계정을 매개로 하여 A계정의 트윗을 자신의 타임라인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내가 리트윗하였다는 사항도 알 수 있습니다).


트윗은 짧은 글이므로 트위터상의 계정에게 말을 거는 용도로도 사용되는데 계정 이름 앞에 @을 붙여서 트윗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타임라인에 나타나게 됩니다. 이를 "멘션(mention)"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트위터에서 고종석 선생님께 말을 걸고 싶다면 @kohjongsok 을 넣어서 트윗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멘션은 기본적으로 트윗이므로 공개될 수 있고, 공개되지 않는 메세지를 보내고 싶다면 "쪽지(direct message)"를 사용하면 됩니다.


트위터를 시작하게 되면 트위터는 추천계정을 알려주고 팔로우할 것을 권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분들을 계속해서 팔로우를 하다보면 자신의 타임라인이 어느덧 좋은 글이나 소식으로 풍성해질 것입니다. 트위터는 자신이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계속 물어다주기 때문에 팔로워를 잘 고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과 취향이 맞지 않는다고 하면 "언팔(unfollow)"하면 됩니다.


하지만 트위터 사용은 조심스러운 것이 트위터는 "글"이긴 하지만 "말"에 가까운데, 말이 일단 입에서 떠나면 남지 않는 반면 트위터는 글의 형식으로 인터넷에 남아 있으므로 "설화"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님이 트윗으로 고초를 겪고 있는 것(정태영 사장님 트위터하지 마세요)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죠. 말로 했다면 해프닝 정도로 끝났을 일들이 트위터에서는 더 크게 문제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셀리브리티가 아니시면 굳이 위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크게 신경쓰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트윗의 장점은 사진, 웹사이트 등을 링크하거나 트윗에 첨부하여 올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의견에 대한 근거가 되기도 하고, 링크된 정보를 알리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트위터를 처음 접한지 3-4년 되는 제가 트위터에 입문하는 분들께 제가 추천하는 파워트위터리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분들은 트윗을 자주 하셔서 타임라인은 흘러가면 안보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놔두시는게 속편합니다. 팔로워가 100명이 넘어가는 순간 타임라인을 모두 읽는 것은 불가능해지기 시작합니다.


소설가 고종석
보수의 아이콘 낙퍼
조선일보 기자출신의 임정욱 
앱개발자 우성섭
역사대하트윗 전문 바베르크
진보적 IT 업계 종사자 그남자
정유업체 회사원 라이언송
마녀사냥으로 더 유명해진 글쓰는 허지웅
가슴을 유달리 좋아하시는 카라챠(성인에게만 추천합니다)


트윗을 사용하는 방법이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신문읽듯이 읽기만 하고, 자신의 이야기는 쓰지 않는 형식으로 사용하는 사람, 드라마보다가 웃기는 장면 나오면 트윗하는 사람(접니다 ㅎㅎ), 회사나 정부기관의 홍보를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 연예인에 대한 소식을 알기 위해 트위터를 보는 사람, 외국사람과 교류를 위해 사용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지요.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다면 신속한 정보전달, 다양한 지식습득, 유명한 사람들과의 쉬운 교류 등 정말 장점이 많은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화장실에서 웹툰만 보기에 질렸다 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2014년 3월 5일 수요일

소설가 고종석


제가 어렸을 때 아버님께서는 "한국일보"를 보셨습니다. 처음 신문을 보게 되었을 때 꼭 찾아보았던 것은 방송편성표에서 오후 5:30에 어떤 만화가 하는지였고, 그 다음에는 일요일 오전 8:00에 어떤 만화가 하는지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특이했던 것은 신문 1면에 있는 기사는 왠지 재미가 없었고, 중간에 경제 관련된 내용도 왜 있는 건지 몰랐지만, 맨 마지막 2-4면을 장식하던 사회면은 제가 거의 매일 즐겨 보던 내용이었습니다. 사회면은 대부분 "어디에 도둑이 들었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패륜을 저질렀다", "연예인 누구가 마약을 했다더라"와 같은 센세이셔널한 내용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중학교때를 거치면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사회"였던 것은 신문 사회면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최근 아버지께 왜 "조선일보"나 "한겨레"가 아닌 한국일보를 구독하셨느냐고 여쭤 보았는데 아버지께서는 두 신문은 보수와 진보를 거의 대변하는 극단적인 논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도적 성향의 신문을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덕분에 한국일보를 구독하게 된 우리 집에서 신문을 접하게 된 저는 한국일보 기자이자 논설위원이었던 "고종석"이라는 이름을 꽤나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기자나 논설위원의 이름을 굳이 기억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고종석"이라는 이름을 제가 기억한 데에는 제 성이 "고"이기 때문인 이유가 가장 클 것입니다. 물론 제가 기억하지 않더라도 이미 "고종석"은 명사 내지 셀리브리티 라는 범주에 포함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고씨 중에 대중적 인지도가 가장 큰 사람은 바로 "고종석"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아직 명사의 반열에 들어서기 전 상태인 한국일보 기자이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던 "고종석"은 일반적인 기자와 달리 "저술"을 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석"의 저술활동에서 특이했던 점은 "소설"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던 것인데, 최근에는 지금까지 발표하였던 단편들을 묶어서 "플루트의 골짜기"라는 소설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소설들의 내용은 유년시절 전주에 갔었던 자신의 경험, 파리에 체류하였던 자신의 경험 등이 묻어나 있어서 반은 소설이고 반은 실제인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하고, 그 가운데서 인생의 아름다움, 덧없음, 인생에 대한 저자의 깨달음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합니다. 저는 작가 고종석의 첫 소설집인 "제망매"부터 사보았는데, 처음 접했을 때보다 "플루트의 골짜기"로 1994년부터 2008년까지의 작품을 한번에 모아놓은 소설집을 읽을 때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마도 20대에 읽는 것과 30대에 읽는 것은 느낌을 또 다르게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부터 "고종석"은 트위터를 활용하는 몇 안되는 문인 중 하나로서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절필"을 하였다고 하시면서 트위터로 매일 자신의 일상을 세상사에 대한 커멘트를 날리고 있습니다(고종석 트위터 계정). 그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을 블로그의 형태로 기록해 놓았던 것 같습니다(고종석 블로그).

얼마 전에 친한 지인께서 소개를 해주셔서 "고종석" 선생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담배를 매우 좋아하시고 소탈하시며, 기자 출신 답게 사소한 것까지 기억을 하고 계신 것(거의 1년전 쯤에 제 학력 등을 간단히 알려드린 적이 있었는데 그걸 기억하고 계시더라구요)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플루트의 골짜기 를 읽으면서 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다음 부분입니다. 덧붙여 이걸 읽고 기 파랑 이라는 프랑스 언어학자가 있었는지, 이름이 기 파랑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할 정도로 빨려들어갔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옳은 것에 대한 신념이 때로는 옳지 않은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스페인에서 알았다. 그것이 권력이든 도덕률이든 신앙이든 이념이든 국가든, 커다란 것에 대한 맹목적 사랑은 인간을 얼마나 왜소하게 하는가?" - 고종석, 플루트의 골짜기(찬 기 파랑), 30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