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 빠리의 기자들, 새움(2014)
기자 고종석이 소설가 고종석으로서 낸 첫번째 소설인 [기자들]을 수정하여 [빠리의 기자들]이란 제목으로 다시 펴냈습니다. 아무래도 저자의 첫번째 외국체류의 경험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라고 추측되었고 그 기대대로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기자들과의 에피소드, 고종석 기자가 유럽에 나가서 취재활동을 하면서 [유럽]지에 실은 기사들, 동독의 붕괴이후 동독지역 지식인과의 인터뷰 등을 소설의 형식 안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저자가 법학도였다는 것을 아는 저로서는 저자가 법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타내는 부분이 나와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음에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 때 나는 인과적 행위론이니, 목적적 행위론이니, 사회적 행위론이니, 미필적 고의니, 인식있는 과실이니,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니 하는 잡스러운 개념들로 가득 찬 형법 교과서를 생각했고..."
-고종석, 빠리의 기자들, 새움(2014), 158면.
법학을 공부하고 법조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 두가지 진입장벽으로 종종 "한자"가 섞여 있는 법조문과 법서들 자체와, 형법의 수많은 행위론들을 들 수 있었습니다. 십년전만 해도 법서에 있는 한자들은 이공계의 수많은 두뇌들이 사법시험을 쳐다보지 않게 하는 진입장벽이 되었었는데, 어느 순간 법서에서 한자들이 괄호 안에 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한자가 그 용어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아니면 쓰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서 마침내 의사출신, 공학박사 출신 변호사를 주위에서 보는 것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쨌든 언어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저자가 법학을 공부하는데 사실 한자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형법의 행위론이나 개념들인데, 이게 실제로 누가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판단하는 데에는 전혀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형법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이유로 문제로 출제되고 그것이 당락을 좌우하는 지라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저자는 이를 "잡스러운 개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 잡스러운 개념이 무엇인지 간단히나마 알아보고 저자의 심정을 이해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단 개념들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왜 행위론이 문제가 되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형법은 범죄를 다루는 학문이고, 범죄는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위법하고 유책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범죄는 행위의 존재를 요건으로 합니다. 형법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행위로서 범죄의 모든 발생형태에 보편타당하게 적용될 수 있는 행위개념은 가능한가, 이러한 행위개념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해야 하는가 또는 규범적으로 파악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행위론 이라고 합니다. 행위론은 형법적 의미에서 행위와 비행위를 구별하여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 거동을 제외하는 기능(한계기능), 형법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의 행위를 통일개념으로 파악하게 하는 기능(분류기능), 행위-구성요건해당성-위법성-책임-형벌로 이어지는 형법체계를 구성하는 기능(결합기능)을 합니다.
인과적 행위론은 행위를 의사에 의하여 외부세계에 야기된 순수한 인과과정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인과적 행위론에 따르면 행위를 일정한 거동의 유의성으로 보게 되므로, 행위개념에 부작위를 포함시킬 수 없게 되고, 미수행위의 개념결정에 난점을 보이는 등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목적적 행위론은 행위를 본질적으로 목적활동성의 작용으로 봅니다. 그러나 목적적 행위론은 고의를 설명하는 데 뛰어나지만 과실행위나 부작위의 구조를 설명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사회적 행위론은 인과적 행위론과 목적적 행위론이 존재론적 방법만으로 행위를 파악하려고 하였다면 여기에 규범적인 방법으로 행위를 규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도 학자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슈미트의 사회적 행위론, 객관적 사회적 행위론, 주관적 사회적 행위론 등으로 나뉘어 설명됩니다.
미필적 고의는 구성요건적 결과에 대한 인식 또는 예견이 불명확한 경우 중 결과의 발생 자체가 불확실한 경우를 말합니다. 즉, 행위자가 구성요건적 결과의 발생을 확실하게 인식한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예견하고 행위한 경우를 말합니다.
미필적 고의는 인식있는 과실과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가 문제되는데, 미필적 고의는 말 그대로 "고의"인 만큼 미필적 고의를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그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범죄의 "고의범"으로 처벌되지만, 인식있는 과실을 가지고 범죄의 결과를 발생시킨 사람은 그 구성요건이 "고의범"만 처벌하고 있으면 처벌되지 않고, "과실범"을 처벌하고 있는 경우에 한하여 과실범으로 처벌되기 때문입니다.
그 구별기준과 관련하여 개연성설, 가능성설, 용인설, 감수설 등이 주장되고 있는데, 감수설에 따르면 결과발생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를 진지하게 고려하였을 뿐 아니라 구성요건 실현의 위험을 감수한 경우에는 미필적 고의이고, 이에 반하여 행위자가 구성요건적 결과발생을 회피할 수 있다고 신뢰한 경우가 인식있는 과실이라는 것입니다.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는 행위자가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하여 자기를 심신장애의 상태에 빠지게 한 후 이러한 상태에서 범죄를 실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불법의 실행은 책임무능력 상태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결정적 원인이 책임능력상태에서 행위자에 의하여 자유롭게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책임무능력 상태의 행위라도 처벌되고, 형이 감경되지 않게 됩니다.
사실 형법을 공부할 때 위와 같은 개념 하나 하나에 천착하게 되면 수많은 개념에 질식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독일의 형법과 범죄 관련 이론이 수입되면서 체계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리고 번역투의 문구는 일반인에게 너무도 생소해서 당연히 "잡스럽"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 문제가 되는 사안에서 위와 같은 개념이 도움이 되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듭니다. 어쩌면 위의 이론들은 실무가 또는 학자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장난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개념들이 행위-구성요건해당성-위법성-책임-형벌이라는 형법의 체계를 이루는 토대가 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잡스러움을 뚫고 형법에 발을 들여놓고 마침내 실무가나 학자가 된 많은 분들을 위한 한마디 변명이었습니다.
참고 : 이재상, 형법총론, 박영사(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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