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6일 일요일
찻주전자 우화와 입증책임
리처드 도킨스, 이한음 역, 만들어진 신, 김영사(2007)
"우리는 신의 존재 문제가 원칙적으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전제로부터 그의 존재와 비존재가 동등한 확률을 갖는다는 결론으로 건너뛰는 오류를 흔히 접하게 된다.
그 오류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은 거증책임을 이용하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찻주전자 우화가 그 방법을 제대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수용된 독단적 견해는 독단론자들이 아닌 회의론자들이 반증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물론 그것은 잘못이다. 내가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형 궤도를 따라 태양을 도는 중국 찻주전자가 하나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찻주전자가 우리의 가장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작다는 단서를 신중하게 덧붙인다면, 아무도 내 주장을 반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주장이 반증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용납하기 어려운 억측이라고까지 내가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로 여겨져야 옳다. 하지만 그런 찻주전자가 존재한다고 옛 서적에 명확히 나와 있고, 일요일마다 그를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치며, 학교에서도 그를 아이들의 정신에 주입시킨다면, 그 존재를 선뜻 믿지 못하는 것은 괴짜라는 표시가 될 것이고, 이를 의심하는 자는 계몽시대의 정신과의사나 그 이전의 종교 재판관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 만들어진 신, 83면.
민법이나 민사소송법을 공부하면서 제대로 접하는 것은 처음인 개념 중에 하나가 "입증책임"입니다. 어떠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그 권리를 주장하는 자에게 "입증책임"이 있으므로, 입증에 실패하게 되면,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증명을 요하는 사실(요증사실)의 존재여부에 대해 증거조사를 거쳤으나 그 사실이 결국은 진위불명인 경우에, 판결시에 그 사실이 존재하는 않는 것으로 취급받게 되는 당사자 일방의 위험 또는 불이익을 (객관적) 입증책임이라고 한다. 법규정은 법률요건과 법률효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당사자가 어떠한 법률효과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 사실의 존재여부가 불확실한 경우에는 그 사실이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결국 일방 당사자는 그에 따른 법률효과마저 부인당하게 되는데, 일방 당사자가 입는 위와 같은 불이익을 (객관적) 입증책임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는 형사소송법에서의 거증책임에 대응한다.
쉽게 말하면 법관이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입증책임이 있는 당사자에게 불이익하게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A가 B에게 돈을 빌려주었는데, B가 돈을 갚지 않아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하면서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합시다. 그런데 A는 B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는 내용의 서면 예컨대 "차용증" 같은 증거는 없었습니다. 이때 "A가 B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그로부터 "A가 빌려준 돈을 소정의 이자와 함께 돌려받을 권리"가 인정됩니다.
우선 B는 A로부터 돈을 빌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한다고 합시다. 법관으로서는 A가 적어도 B의 예금계좌로 돈이 이체되었다는 등의 증거도 제출되지 않는 경우에는 A의 주장이 맞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A의 주장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법관으로서는 상대방인 B가 부인하는 마당에 객관적 증거 없이 A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소위 진위불명상태이므로 입증책임을 지는 A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이와 달리 B가 A로부터 돈을 빌린 것은 맞는데, 이미 갚았다고 주장한다고 합시다. A의 주장 즉, A가 B에게 돈을 빌려주었다는 사실은 B가 인정하였으므로 증거가 없더라도 이것은 소위 "다툼없는 사실"로 정리됩니다. 다만, B가 갚았다는 주장은 "항변"으로서 B에게 "자신이 이미 돈을 갚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책임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B가 A에게 돈을 갚은 때 받은 "영수증"과 같은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여 법관이 진위불명에 빠지게 되면, 입증책임을 지는 B에게 불리하게 B가 A에게 빌린 돈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결론이 내려지는 것입니다.
입증책임은 소송에서는 대부분 법규정에서 법률요건을 주장하는 자에게 입증책임이 있는 것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모든 사항에 대하여 당연히 칼로 무자르듯 입증책임이 완벽히 분배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환경소송이나 공해소송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입증책임 부담원칙에 의한다면 환경오염이나 공해의 존재사실, 피해자의 손해(건강의 악화 내지 재산의 손실), 환경오염이나 공해와 피해자의 손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모두 원고가 입증책임을 지는 사항인데, 인과관계의 엄격한 입증을 요구하게 되면 거의 항상 원고에게 불리하므로, 예외적으로 입증책임의 증명정도가 완화되거나, 원인제공자에게 입증책임이 전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의 존재증명에 대해서는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에 대하여 입증책임이 있는 것인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의 부재"에 대한 입증책임이 있는 것인지와 관련하여 리처드도킨스는 당연히 유신론자에게 입증책임이 있고, 유신론자가 신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하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유신론자의 주장은 중국식 찻주전자가 존재한다는 주장과 같은 수준의 주장임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식 찻주전자와 달리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이 믿고 있고, 오래된 경전이 있고, 일요일마다 신성한 진리라고 가르쳐지고 있다는 다른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문제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를 판단할 법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의 존재와 관련해서는 엄격한 의미의 입증책임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믿음"으로 합리화하고, 자신과 달리 이를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적의를 드러내는 태도에 대한 저자의 거부감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신념을 (그것이 종교이든 이념이든 취향이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신념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이념적 동지"보다는 기본적인 예의 갖추고 있는 "이념적 반대자"에게 호감이 가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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