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14일 화요일

[책 소개] 재판으로 본 세계사



박형남, 재판으로 본 세계사, 휴머니스트(2018)

이 책의 저자는 현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님이시고, 제 사법연수원 시절 지도교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번 책 소개는 투명하게 편파적으로 사심이 들어간 책 소개입니다. 하지만 굳이 편파적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책에 담긴 내용은 법원, 재판,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 합니다. 소크라테스에거슬러올라가 중세 유럽을 거쳐 현대 미국에 이르기까지 법원의 판결은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인간사의 도도한 흐름을 때로는 거스르기도 하고, 때로는 주도해 나가기도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어떠한 사안에 대한 간략한 주요사건의 나열과 쟁점의 정리는 수십년간 판결문을 써오신 내공이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일반적인 저자였다면 여기저기 핵심을 비껴가는 사건을 설명하면서 벗어날 논점을 꼭꼭 찝어내고 있으신 것이 인상적이었네요.

특히 큰 관심이 없었던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문제된 재판들에 대해서 읽는 과정은 일반 역사책들에게서 무언가 빠진 듯하게 느껴졌던 갈증을 해소해 주기도 했고, 저도 모르고 있었던 해방정국의 민법 제14조 관련 대법원 판결을 보면서 사람은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단점이라면 위와 같은 장점을 취하기 위해서는 흥미를 유발하는 문장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약간의 교과서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워낙 엄청난 정보를 짧은 글에 응축시켰기 때문에 사전에 역사적 사건이나, 해당 판결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책을 읽는데 시간이 꽤 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교수님의 담담히 이야기해주시듯 설명하는 문장에,  다음 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 주실까 기대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법원이나 법조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또 색다른 측면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흥미가 있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셔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제게 인상깊었던 구절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어중이떠중이 의견이 아니라 덕 있는 사람들의 지혜로움으로 정치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테네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시민들의 권력을 무시하는 것으로서 시대의 흐름에 반했다.
-박형남, 재판으로본 세계사, 휴머니스트(2018), 36면.

존경하는 재판관 여러분, 내가 이토록 중대한 재판을 받으면서 국왕과 국왕의 고귀한 자문관들을 다 제쳐놓고 리치 경처럼 진실성이 없다고 소문난 자를 믿고 국왕의 수장권에 대한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점이 나를 잡으려고 오랫동안 노려온 쟁점 아닙니까? 여러분이 판단하기에 이게 사실일 수 있겠습니까?
-박형남, 재판으로 본 세계사, 휴머니스트(2018), 82면.


수평파는 모든 성인 남성에게 참정권을 주고 인구수에 기초해 선거구를 결정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급장교들은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양쪽의 주장을 차례로 들어보자.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도 가장 위대한 사람들과 동일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어느 정부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은 그 정부의 지배를 받겠다고 스스로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목소리를 전달하지 못한 정부의 결정에 구속당할 이유가 없다.

재산을 가진 사람들만이 실제로 잃을 것이 있기 때문에 왕국 일에 관여할 이유가 있다. 이들만이 영구적으로 고정된 이해관계가 있다. (재산이 없는 사람은) 영국에 살 자연권은 있어도 투표할 자연권은 없다. 재산이 없는 사람들이 권력을 쥐게 되면 재산이 있는 사람들의 부를 빼앗기 위해 투표하게 될 것이다.
-박형남, 재판으로 본 세계사, 휴머니스트(2018), 149면.


1990년 결정에서 간통죄가 위헌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양균 재판관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 사건에서 혼자 전면 위헌 의견을 쓰면서 30-50년 안에는 내 의견대로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19년이 지나 지난 4기 재판관 5명이 위헌의견을 냈다. 검사 생활을 통해 간통조항이 상습적인 사람이 아닌 우발적인 사람들에게 주로 적용되는 걸 알았다. 이 조항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가정과 개인이 파탄나는지 알게 된 것이 위헌 의견을 내는 데 토대가 되었다. 간통 조항은 위헌이고 반헌법적이며 촌스럽다.
-박형남, 재판으로 본 세계사, 휴머니스트(2018), 192면.


단호히 말하건대, 어떤 것이 법인가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은 사법부의 영역이자 본분이다. 특정 사건에 규칙을 적용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 규칙을 설명하고 해석해야 한다. 만약 두 법률이 상충한다면 법원은 반드시 각 법률의 시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만약 어떤 법률이 헌법에 대립하고 그 법률과 헌법이 특정 사건에 적용된다면, 법원은 헌법을 무시하고 법률에 맞게 사건을 결정하거나 법률을 무시하고 헌법에 맞게 사건을 결정해야 한다. 법원은 상충하는 규칙 중 어떤 규칙이 사건을 좌우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법부가 지닌 책무의 본질이다.
-박형남, 재판으로 본 세계사, 휴머니스트(2018), 204면.


드레드 스콧 판결은 미국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받을까? 소수 의견이 지적했듯이, 판결은 법 규정과 이론에 근거하지 않았으며 흑인은 선천적으로 열등하다는 편견으로 인종차별에 동조한 판사 개인의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흑인 노혜 문제는 도적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러 원인이 얽히고설켜 해법이 어려웠는데도 사법부의 권위에 의존해 단번에 해결하려고 한 것은 태니 대법원장의 만용이었다. 의회가 1820년의 미주리 타협으로 지역 간 대립을 간신히 봉합했는데, 대법원이 이를 무시하고 전적으로 남부에 유리하게 결정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박형남, 재판으로 본 세계사, 휴머니스트(2018), 232면.


시간이 지난 후에는 명백하게 보이지만, 태풍이 지나가는 한가운데에서 판사는 길을 잃어버리거나 방향을 거스르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운명적 존재다. 드레드 스콧 판결이 있은지 약 100년 후 워런 대법원장은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결했으며, 약 150년 후 아버지가 흑인인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박형남, 재판으로 본 세계사, 휴머니스트(2018), 235면.


1945년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일제가 만든 민사법이 여전히 적용되었는데, 거기에 "처가 소송을 제기하려면 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1947년 미군정시기에 대법원은 아내가 남편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제기한 가옥 인도 소송에서 이 조항을 적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처에 대하여는 민법 제14조 제1항에 의하여 그에 해당한 행위에는 부의 허가를 수함을 요하여 그 능력을 제한한바, 이는 부부간의 화합을 위한 이유도 없지 않으나 주로 부에 대하여 우월적 지배권을 부여한 취지라고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서기 1945년 8월 15일로 아방은 일반의 기반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우리는 민주주의를 기초삼아 국가를 건설할 것이고, 법률, 정치 , 경제, 문화 등 모든 제도를 민주주의 이념으로 건설할 것은 현하의 국시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민은 모름지기 평등할 것이고 성의 구별로 인하여 생한 차별적 제도는 이미 민주주의 추세에 적응한 변화를 본 바로서, 현하 여성에 대하여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하고 기타 관공리에 임명되는 자격도 남성과 구별이 무하여 남자와 동등한 공권을 향유함에 이른 바인즉, 여성의 사권에 대하여도 또한 동연할 것이매 남녀평등을 부인하던 구제도로서 그 차별을 가장 현저히 한 민법 제14조는 우리 사회 상태에 적합하지 아니하므로 그 적용에 있어서 변경을 가할 것은 자연의 사세이다. 자에 본원은 사회의 진전과 법률의 해석을 조정함에 의하여 비로소 심판의 타당을 기할 수 있음에 감하여 동조에 의한 처의 능력 제한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바이다(대법원 1947. 9. 2. 선고 1947민상88).
-박형남, 재판으로 본 세계사, 휴머니스트(2018), 291-29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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