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8일 목요일
법학 입문자에게
*사진은 "민법입문"이라는 책의 저자 이신 양창수 전 대법관님입니다.
지난 해 말 모교의 동기유발캠프라고 하는 행사에 법조직역을 소개하는 내용의 특강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1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변호사 및 법조직역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동기유발캠프는 명문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동문 선배들이 고등학교 2학년인 후배들에게 학교 구경 및 대학생활에 대한 설명을, 각 직업 분야의 직역에 진출한 선배들이 자신에 직업에 대한 설명을 해 주는 프로그램들로 짜여 있었는데 그 중 일부를 맡은 것이었지요.
법조직역에 설명하다 보니 법학공부를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누가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거로 돌아가 대학 2학년 사법시험을 처음 시작할 당시에 무슨 책을 잡고 어떻게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제 의문에 대하여 지금의 나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만약에 제가 20년 전의 저에게 대답한다면 양창수 전 대법관님의 "민법입문"[양창수, 민법입문, 박영사(1991), 현재 제6판(2015)이 나와 있습니다]을 그 지침에 따라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민법입문에서 양 전 대법관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법전을 펴놓고 책에서 인용되는 법규정을 수시로 찾아보고, 책에서 뒤에 나올 것이나 앞에서 이미 나온 것을 참조하라는 지시가 있으면(예컨대 뒤의 [106] "둘째" 참조, 이와 같은 지시) 반드시 실행하면서 책을 읽는 것입니다. 법서는 그렇지 않아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입니다. 이런 지시를 이행하면서 읽는 경우 1페이지에 10분 걸릴 것이 30분, 1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어서 4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는데 1달(또는 그 이상)이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학의 초심자로서 기초를 닦고 싶다면 초기에 많은 시간이 드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 나중에 자신의 수준을 수월하게 높일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하는 당시에 제가 양 전 대법관님의 민법입문을 읽으면서 공부를 시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총론, 채권각론 수업을 들으면서 민법 교과서들을 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한 법학공부 초심자와는 다른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법서를 처음 보면서 법조문과 참조지시를 이행하면서 읽는 원칙은 지켜서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당시에 민법입문을 읽지는 않았었던 것 같은데, 교과서도 모자라 책을 마구 사는 친구 옆에서 슬쩍 서문이라도 읽어보아서였을지 않을까 추측해 봅니다. 순서대로 책을 줄줄 읽는 것이 기본적인 용어와 이론을 모르는 상태에서 가능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책을 왔다갔다 하면서 읽는 것이 지루함을 많이 덜어주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법학에 익숙해지는데 더디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양창수 전 대법관님께서는 판사로 재직하다가 교수가 되신 당시로서는 특이한 경력의 교수님이셨는데(양 전 대법관님을 필두로, 판사 출신의 윤진수, 김재형 교수님 등이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시게 됩니다), 제가 학부 다닐 무렵(1995년-199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민법을 가르치고 계셨고, 강의가 매우 인기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원시원하게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리다 하시는 직설적인 화법이 매력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책을 보아도 화통하신 성격이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퇴임하시면서 한 인터뷰에서도 기자들에게 엄하게 하셨던 모양이네요([법조라운지] 퇴임하는 양창수 대법관, 법률신문 2014. 9. 1.자).
민법입문에서 "들어가기 전에"라고 하여 자신의 책을 읽는 방법을 지시하시는 부분만 읽어도 법학을 어떤 자세로 공부해야 할 것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게 안되면 법 공부를 그만 두라"는 부분에서 양 전 대법관님 다우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해 둡니다.
들어가기 전에
1. ...
2. 대부분의 법학 교과서에서도 그러하지마는, 이 책에서도 뒤에 나올 것이나 앞에 이미 나온 것들을 '참조하라'는 지시가 많이 등장한다. 이 지시는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는데,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 이 책을 포함하여 법학 교과서를 읽는 경우에는 읽어 넘긴 쪽수의 양에 집착하여서는 안 된다.
3. 앞으로 이 책에서,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낯선 용어를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용어가 빈번하게 나온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사람은 애초에 법 공부를 그만 두는 것이 좋다.
모든 전문 분야가 그러하듯이, 법에서도 고유한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 용어는 말하자면, 법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공통의 교신부호와 같은 것으로서, 수학이나 컴퓨터프로그래밍 또는 기호논리학에서 쓰이는 숫자나 각종의 부호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모름지기 애써 의미를 이해하고 익혀서 몸에 배게 할 일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법언어에 관하여는 개선하여야 할 점이 많이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법이 도대체 불만스러워서 견딜 수 없다고 하면, 이는 법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4. 이상을 읽어보아도 알겠지만, 현재의 단계에서 법을 공부하는 데는 한자를 잘 알 필요가 있다. 헌법을 위시하여 민법이나 형법 기타 주요한 법률이 한자를 쓰고 있기 때문에, 이는 부득이한 일이다.
...
양창수, 민법입문 제6판, 박영사(2015), vii - 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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