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19일 토요일

[책 소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이용훈 대법원장 재임기간 있었던 대법원 판결들과 그에 얽힌 뒷이야기들. 그래도 이슈가 되었던 대법원 판결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도, 이 책에서 요지를 처음 접하는 대법원 판결이 있을 정도로 많은 대법원 판결들이 내용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김영란 대법관님께서 집필하셨던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 와 겹치는 판결들이 많지만, 아무래도 이용훈 대법원장과의 인터뷰를 기초로 하여 씌어진 책이니만큼 사건 수에서도, 그 뒷이야기도 더 많은 편입니다.

저자는 오랜기간 중앙일보-JTBC의 법조/사회 담당에 있었기 때문에 대법원의 구성변화와 대법원 판결의 변화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아무래도 소수의견을 대변하는 박시환 대법관과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했기 때문에 적어도 진보적인 입장표명에 대해 관대했던 이용훈 대법원장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지만, 대법원 다수의견의 입장은 그 자체로 규범력이 있어서 소홀히 다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대법원 다수의견에 동조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책을 읽을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인에게는 관심도 없고 생소한 대법원의 구성이나 임명절차, 그리고 그에 얽힌 법원 고위 판사들 사이 또는 그들과 청와대, 검찰과의 줄다리기가 대법원장/대법관 입장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쉽게 접할 수 있는 형태나 내용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정도로 자세히 그려낸 것은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신동아나 월간조선에 분석기사로 실리는 글들 정도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적이 있었을까요).

어쨌든 기본적인 법조 관련 경험과 지식이 있다면 "헉 이런 내용까지" 하면서 읽을 만한 내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법사회학적으로 대법관들의 경향이나 판결내용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책이나 기사가 미국 등에 비해 너무 부족한 우리 법조에 기념비적인 저작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물론 그럼에도 내용 때문에 선풍적인 인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 하지만 이용훈 대법원장 시대에 우리 대법원의 주요 판례를 모르고 있었던 변호사/법조인은 꼭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박시환/전수안 대법관이 대법원장 물망에 오르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다음은 인상깊었던 부분입니다.

양승태는 지방자치단체장의 위법행위에 대한 국가/상급 지방자치단체의 감독원 행사에 대해 "국법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는 국가 등의 당연한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는 보충의견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이러한 사건에서 국가의 부당하 ㄴ간섭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지방자치단체장의 재량권 일탈/남용을 방지하는 것을 훨씬 더 걱정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고 못박았다. 이처럼 양승태의 법논리가 국법질서와 국가(중앙정부) 우위의 관점에 서 있다는 점은 이용훈 코트의 뒤를 잇는 양승태 코트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153면.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말한다. "요즘 법정에서 논리를 제시하면 '대법원 판례가 이렇다'고 제지하는 판사들이 있다. 대법원 판례만 따라간다면 전국에 그 많은 판사들이 왜 필요한가." 판사가 사건에 대한 열정과 고민 없이 대법원 판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173면.


2007년 12월 2년만에 법원조직법을 재개정해서 다시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을 겸임하도록 했다. 대법관회의 의결권이 없는 법원행정처장이 사법행정을 주도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대국회 창구가 비대법관출신 법원행정처장으로 바뀐 뒤 국회의원들의 불만이 계속됐다는 것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186면.


대법원의 공소장 일본주의 판결은 이후 재판에서 폭넓게 활용되지 않았다. 일부 재벌사건이나 정치인 사건에서 주장됐을 뿐이다. 변호사들도 공소장일본주의 위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앟았고, 판사들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법원에서 획기적인 판례가 나오더라도 현장의 법조인들이 경각심을 갖고 분발하지 않는다면 '종이 호랑이'에 불과함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181면.


젊은 판사들의 장래 희망이 '공보담당판사 -> 법원행정처 심의관 -> 고등법원 부장판사 -> 법원행정처 차장 ->대법관' 이라는 말이 나오는 건 정상이 아니다. 법원행정처, 대법관을 목표로 재판하는 판사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중앙집권적인 관료사법을 수술하는 것을 검찰개혁과 함께 할 또 하나의 과제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191면.


이용훈은 강일원에 대해 "생각은 조금 보수적이지만 민주주의 원리나 법치주의, 법관의 품성에 있어 깊이를 가진 판사"라고 평가했다. "듣기 싫은 소리를 기분 나쁘지 않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강일원은 이광범-김종훈 팀이 사라진 이용훈 코트 후반기 사법행정을 이끌었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246면.


긴급조치 판결이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과오에 대한 것이라면 조봉암 재심 판결은 '이승만 시대'의 대표적 과오에 대한 것이다. 지체된 정의의 해악은 정의가 아니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체된 정의는 악을 조장하고 방치한다. 그 악을 바로잡는 데 몇 배, 몇십 배의 에너지가 소모된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276-277면.


"신영철은 자신 사퇴할 것"이라고 말했던 이들도 자신들의 말을 더이상 입에 올리지 않았다. 어떤 이는 그게 큰 일이냐고 했고, 어떤 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했다. 어떤 이는 속았다고 했다. 잘잘못을 가리고 책임을 묻는 일을 하는 법원과 판사들이 정작 자신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모두가 부끄러워야 했지만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315면.


법무법인 바른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정동기 청와대 민정수석, 강훈 법무비서관 등 소속 변호사들이 정부에 들어가면서 각광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는 법무법인 화우, 이명박 정부는 법무법인 바른'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급성장의 배경을 이명박 정부의 출범에서만 찾는 것은 무리가 있다. 최종영 전 대법원장, 박재윤 전 대법관, 김동건 전 서울고법원장, 명로승 전 법무차관, 문성우 전 대검차장,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 등 법원/검찰의 고위 전관들이 대거 영입돼 '송무로펌'으로 자리를 잡았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325면.


정의는 법논리와 법 감정, 머리와 가슴 사이에 있다. 맥락을 끊어낸 법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법이 형식논리의 포로가 된다면 기득권의 편법과 탈법, 불법을 눈감아주는 결과를 낳는 것 아닌가. 재벌 사건에서 대형 로펌 변호사들이 벌이는 화려한 법 논리의 향연은 돈 없고 힘없는 시민들의 박탈감만 더할 뿐이다. 집행유예로 빠져나가는 재벌 회장들의 휠체어만큼 사법 신뢰를 위협하는 것은 없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355면.


그러나 이길 수 없었다고 해서 패배한 것은 아니다. 철수했다고 해서 포기한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다시 세운 나라다. 패배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정의를 위해 스스로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는 순간 우리는 정의롭다. 정의는 명사가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동사다.

권석천,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 창비(2017), 47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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