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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2일 화요일

[책 소개] 아무 날도 아닌 날



트위터를 하다가 톡 쏘는 문구가 눈에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트위터에 대한 소개와 사용법에 대해서는  파워 트위터리언  참조). 대부분 그 문구를 쓴 사람을 팔로우를 하고 그 사람의 지금까지의 트윗들을 훑어보게 되는데, 그러면서 발견한 주옥같은 트위터 중의 하나가 이 책의 저자인 최고운씨의 트위터(@toxicalice) 였습니다. 짧은 글들을 트윗에 남기기도 하셨지만 긴 블로그 글도 쓰셔서 이 분의 블로그(앨리스의 화려한 생애)에 종종 들러 보곤 했었습니다. 블로그 글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책에도 소개되어 있는 "나는 어떻게 비키라인 제모를 망쳤나" 였습니다. 젊은 여성에게서 연애와 삶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이미 저도 K-저씨의 조짐이 보이고 있어서 불안하다는...) 저에게는 이분의 글을 읽는 것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교통사고가 나 입원하셔서 어려운 시간을 보내다가 요새는 책을 내시고 첫 강연도 하시고 밝아지셔서 저도 덩달아 기뻐졌다고 할까요. 블로그에 올라온 첫 강연에 대한 글(첫 번째 강연에서 했던 말)을 읽고 바로 그날 이 책을 주문했는데 도착한 오전에 휘리릭 다 읽었습니다.

작가로서 첫발을 내딛으신 것을 축하드리고, 앞으로도 재기발랄한 글들 기대하겠습니다.

다음은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부분들입니다.

인간은 생물학적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나잇값을 하느냐 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26면.

예외인 경우도 물론 있다. 아무리 선머슴짓을 해도, 누나를 자처해도, 심지어 엄마처럼 굴어도 통하는 여자, 바로 예쁜 여자다.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27면.

A relationship, I think, is like a shark. You know? It has to constantly move forward or it dies. And I think what we got on our hands is a dead shark.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41면.

'데이트 지랄'이란 한 번 해야 무서운 것이며, 계속 잔소리를 해대면 있던 미안함도 사라진다는 것을 여자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47면.

나처럼 소름끼치게 예쁘지도 않지만, 그다지 까다로운 구석도 별로 없는 여자들은 평생 마를 날이 없는 법이다.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72면.

내가 아는 게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 알며, 더 나아가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120면.

기본 아이템이라는 게 다 그렇다. 옷이든 구두든 가방이든지 간에 알록달록한 걸 구비하려면 이미 많은 밋밋한 것들이 있어야 가능하다.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135면.

따지고 보면 현실에서의 작업 멘트란 건 아무래도 시시하기 짝이 없다. '추운데 몸 좀 녹이고 가자' '술깨고 가자' 아니면 '방 잡고 술마실까'를 지나 '손만 잡고 잘께'로부터 이어져 '오빠 못 믿니'까지.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171면.

갖고 싶은 가방이 있어 동그라미를 쳐 놓은 광고지를 벽에 붙여 놓았다. 저건 술 세번만 안 마시면 살 수 있어. 그렇게 한달이 흘렀다. 광고지는 여전히 붙어 있고, 술은 다섯 번 정도 마셨다.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225면.

팔리지 않는 글을 쓰고, 반응이 없는 그림을 그리고, 기껏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서 음담패설을 올리는 것으로 바이트와 인생을 동시에 낭비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게 좋아서 열중하는 것으로, 그것으로 이미 좋은 세상을 만들고 있다.
-최고운, 아무 날도 아닌 날, 라의눈(2015), 248면.


마지막으로 저자가 외우고 다니셨다는 "나는야 세컨드"도 기억에 남아 남겨둡니다.

나는야 세컨드1 

- 김경미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 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 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쉿, 나의 세컨드는 - 김경미 시집 
김경미 (지은이) | 문학동네 

2014년 11월 12일 수요일

크롬캐스트


크롬캐스트가 처음 출시되었을 때에는 아이폰/아이패드와 호환도 되지 않고, 사실상 유튜브를  TV화면에서 보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즐겨 사용하는 티빙앱이 업데이트가 되면서 적어도 티빙에서 재생되는 모든 프로그램을 크롬캐스트가 꼽히는 TV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크롬캐스트는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의 크롬 브라우저 화면 또는 호환가능한 앱의 화면을 TV로 송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기로, HDMI 단자가 있는 TV라면 바로 꼽아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가격은 49,900원입니다.

사실 크롬캐스트의 장점은 스마트폰 중 일부기능(예컨대 티빙앱, 호환되는 앱들은 유튜브, 구글플레이무비, 벅스, 호핀 등이 있습니다)을  TV로 송출해서 보면서 스마트폰 자체로는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어차피 집에서 사용하므로 와이파이신호가 스마트폰을 통해서 TV에 닿게 될 뿐이라서 그런지(스마트폰의 자원을 얼마나 사용하는지는 측정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비전문가이니까요. ㅎㅎㅎ) 다른 기능 사용에 하등의 문제가 없더군요. 예컨대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다가 인상적인 장면이 나와서 트윗을 하고 싶을 때 보던 드라마를 멈추고 트윗에 들어가서 트윗을 한 다음 다시 드라마를 보는 것은 가능은 하지만 약간 김새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크롬캐스트를 통해 TV에서는 드라마를 보고, 스마트폰으로는 여유롭게 트윗을 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물론, 와이프의 시니컬한 시선을 참아야 합니다!!). 특히 저희 집은 유선방송을 사용하지 않아서 TV에서는 지상파 5개 채널 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tvN이나 JTBC의 인기 드라마 같은 경우는 스마트폰이나 PC가 아니라면 접할 수 없어서 더욱 유용합니다.

크롬캐스트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티빙스틱이란 것을 구입해서 사용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티빙스틱은 티빙앱 전용 크롬캐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유튜브도 지원한다면 저한테는 크롬캐스트와 똑같은 기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티빙앱이 크롬캐스트를 지원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티빙스틱을 그것도 크롬캐스트와 비슷한 가격을 주고 살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구글이 만들어서 판매하는 크롬캐스트가 앞으로 더 많은 앱을 TV 화면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크롬캐스트의 확장성과 발전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아이들한테 뽀로로를 틀어주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지키고 싶은 아빠들에게 추천합니다.

2014년 10월 8일 수요일

하향평준화

공무원 노조 겁내다 국민한테 버림받는다, 중앙일보 2014. 9. 30.자 사설
밥값도 못한 국회의원들, 무슨 낯으로 세비 올리나, 동아일보 2014. 10. 2.자 사설

아무래도 서서히 변해온 것이겠지만 요새 사회분위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공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직역이나 지위 등에 인정되어 왔던 좋은 대우나 처우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일반적인 생활인 수준 이상의 대우나 처우를 받는 것에 대하여 반대의견이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일간신문의 사설에서 공무원연금 삭감 논의나 국회의원 세비인상에 반대하는 논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복지부동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공무원들이 국민연금보다 훨씬 조건이 좋은 공무원연금을 받는 것은 불평등한 처사라고 생각하는 것도 일리가 있고, 세월호 참사 이후 국회가 보여준 헛발질과 무능을 생각하면 세비인상을 반대하고 세비를 깎자고 하는 것이 이해가지 않는 바 아닙니다. 하지만 공무원에게 안정적인 임금과 노후를 보장하고, 국회의원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세비를 지급하고 물가에 연동해 인상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성과에 따라서 성과급을 받는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이 일을 잘한다 잘못한다를 기준으로 처우를 달리하려 하는 시도를 하게 되면, 민간회사와 같은 부패나 불평등한 처우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결과가 도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공무원과 국회의원은 사회의 유지와 운영에 필요한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대우하는 분위기가 필요한 측면도 있습니다. 공공의 일을 한다는 자긍심, 우리 지역구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자존감과 같은 것은 소위 '정신승리'같은 것만으로 갖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상당한 경제적 지원은 그것을 받는 당사자들이 소리내어 요구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경제적 지원이 사라졌을 때 사회구성원들은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에게 "불편부당하게 일처리해 달라", "국가의 대사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달라"고 요구할 근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공무원이나 국회의원도 하나의 생활인이므로 그들로부터 기존에 보장받던 경제적 혜택을 하루아침에 박탈한다는 것은 생계를 위협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고통분담"일 뿐이라면 그것은 그저 사회 전체적으로 "하향평준화"를 하자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국회 의원 세비삭감 관련하여 읽어볼만한 트윗(엄청난 대하트윗임)을 소개해 봅니다.











공무원 복지에 관한 읽을만한 트윗도 소개합니다.


재벌2세도 아닌 이상 과연 그렇 게 잘 살지도 않는 사촌 땅 빼앗으면 나중엔 나 자신의 차례가 되지 않을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지 불안해지는 요즘입니다.

2014년 2월 9일 일요일

흔히 혼동하는 법률용어

영화나 드라마 중에서 법정장면을 삽입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깝게 작년에 개봉하였던 "7번방의 선물"이라든지, 배우 이보영이 국선변호사로 출연하였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만 보아도 법률용어가 매우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직업이 직업이라서 그런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법률용어를 실수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면 무언가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몰입도가 대폭 떨어집니다. 서면에서 오타를 발견하였을 때 느끼는 낭패감 또는 오타가 난 제 서면을 판사나 상대방이 볼 때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불쾌감 같은 거랄까요?

영화나 드라마 만들때 중요한 장면도 아닌데 단역 판사배우가 말실수 한번 한 것을 가지고 다시 테이크를 가거나 재녹음하는게 무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본단계에서 감수하는 법률가들이(끝나고 자막 보면 꼭 나오더군요 ㅎㅎ)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두개씩은 꼭 나오는 혼동하는 법률용어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접한 혼동례는 "피고"와 "피고인"을 혼동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피고인은 "범죄의 혐의를 받아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자"를 말하고, 피고는 형사소송이 아닌 다른 소송에서 청구의 상대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형사재판의 판사님들이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죠. "피고 최후변론하세요" 이 말을 들으면 저는 갑자기 드라마나 영화에서 확 깹니다. 아 이거 진짜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바로 들어버리죠. 실제로 판사님들은 거의 절대 "피고"와 "피고인"을 혼동하시지 않습니다.

형사소송과 다른 소송의 또 다른 점 중 하나는 당사자를 대리 또는 변호하는 변호사에 대한 명칭입니다.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을 변호하는 변호사를 "변호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형사소송이 아닌 소송에서 원고나 피고를 대리하는 변호사는 "소송대리인"이라고 하며 "변호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변호사는 변호인이나 소송대리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의미하는 것이고 소송에서의 지위는 피고인의 변호인, 원고 또는 피고의 소송대리인인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이것을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피고인에는 변호인이 따라다니고 원고 또는 피고에는 소송대리인이 따라다닌다고 생각하시면 혼동을 줄일 수 있습니다.

또 일반인들이 실수를 많이 하는 법률용어로 "구형"과 "선고"가 있습니다.
다음 트윗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법률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사건 모두 현재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사건들인데,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을까요. 두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판단은 별론, "황당한 사법부의 상상과 추정으로 20년형을 구형" 이 부분이 잘못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구형은 형사소송에서 수사와 기소의 책임을 맡고 있는 검사가 판사에게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게 다음 형을 선고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검사의 구형은 법무부 소속 공무원의 피고인에 대한 판단으로서 행정부의 판단이지,  판사가 속한 사법부의 판단은 아닌 것이죠.

형사소송에서 판사의 최종적인 판단은 "선고"입니다. 국정원 수사은폐 김용판 사건에서는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만, 내란음모죄로 기소된 이석기 의원에게는 검찰의 "구형"만 있었을 뿐 재판부의 선고는 없는 상태입니다. 위 트윗을 올린 분도 선고와 구형을 구별하고 있습니다만, 구형이 검찰의 판단이지 법원의 판단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한 것입니다.

앞으로 신문이나 영화 드라마를 보실 때 작가가 이런 실수를 하는지를 주의깊게 보시면 또다른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드라마에 법률감수를 하는 변호사분들은 미리 원고를 달라고 해서(쪽대본이라 받지 못하셨겠죠 ㅎㅎㅎ) 피고와 피고인은 구별해서 고쳐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