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9일 수요일

버튼이 눌릴때


가끔 어떤 일에 별다른 이유없이 빠져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쿨싴하게 넘어가는 문제인데,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발동되는... 소위 "버튼이 눌렸다"라고 하지요.

정식재판청구 국선사건을 처리하다가 피고인이 사실관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 피해자의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에 대해서 부동의하게 되면 증인으로 불러서 증인신문을 하게 되는데, 판사님께서 증인신문시간으로 잡는 간격이 20분 정도 됩니다. 판사님으로서는 20분 안에 한 사건을 끝내면 좋겠다라는 것이고, 검사의 신문이 2-3분 정도 걸리게 되므로 변호인의 반대신문은 15분 정도로 정리하면 좋겠다는 묵시적인 표시이기도 하지요. 증인이 1명인 경우 왠만큼 신문사항이 많아도 30분 안에는 증인신문절차가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작성한 증인신문사항도 1페이지 안에 들어가도록 10문항 내외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후 증인신문이 있어 어제 오후에 증인신문사항을 작성하기 시작한 사건이 있었는데, 증인신문사항작성이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증인신문사항 작성하다가 버튼이 눌린 것이지요. 어제 저녁까지 30개 남짓한 신문사항을 만들고 퇴근했다가 오늘 오전/오후를 다 바쳐서 만든 증인신문사항은 무려 50개.. 가지번호까지 포함하면 약 60개.. 12페이지의 엄청난 양의 증인신문사항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보아하니 한 문항당 질문답변시간을 1분으로 잡아도 50분이 걸리는 엄청난 양.. 필시 판사님께서는 줄여서 질문하라고 하실텐데 어떡할지? 종전에는 양이 많아야 2-3페이지여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물어볼 건 물어봐야지!!"하고 배짱튕기며 법원에 올라갔습니다.

다행이 소환한 증인이 출석하지 않아서 1달 정도 후로 증인신문이 미뤄지기는 하였는데, 덕분에 재판에 다녀오고 나서는 완전히 파김치가 되었습니다. 다음 기일이 되기 전에 판사님께서 놀라시지 않도록 먼저 변호인의견서로 주장과 증거를 정리해서 제출하고, 증인신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에는 시간이 많았음에도 재판 전날에야 증인신문사항을 마련한 게으른 변호인의 불찰로 빚어진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벼락치기의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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