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일 목요일

행복어사전


1991년경에 미니시리즈로 "행복어사전"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재 사극 전문배우의 대명사로 군림하고 있는 최수종씨는 그 당시 젊은이들에게(물론 중고생들에게도)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키던 "트랜디 드라마"의 단골 주연이었습니다. 이 당시를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불러일으킨 "질투", "파일럿", "마지막승부" 등의 드라마가 줄을 이으면서 드라마왕국 MBC의 아성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어사전이라는 드라마의 줄거리는 매우 흐릿하였는데, 이번에 이병주전집을 읽으면서 "행복어사전"이라는 드라마의 원작이 이병주의 소설 "행복어사전"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주인공과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는데, 설정 자체는 많이 달라서 소설을 드라마화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가 느꼈던 것과 유사한 감상이 나타난 부분이 있어서 옮겨 봅니다. 작게 제목을 붙이자면 "시골쥐와 서울쥐" 정도가 될라나요. 서울 토박이는 아니지만 시골에서 살던 사람과 서울에서 살던 사람의 은연중의 생활태도 차이를 경상도인의 입장에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물건을 주는 행위, 즉 선심을 쓰면서도 그만한 배려를 한다는 건 퍽이나 세련된 심정이라 느끼고 나는 오랫동안 그런 세련된 심정이란 것에 대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떤 기회에 나는 L씨가 오대째의 서울 사람이란 사실을 알았다. 그래 문득 L씨의 그런 매너와 그가 서울 사람이란 사실과 무슨 관련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세밀하게 서울 사람들을 관찰하는 눈을 가졌다. 아니나 다를까 토박이 서울 사람들은 남으로부터 무엇을 받는다든가 얻어내는 데 있어, 우리 경상도 사람관 전연 달리 굉장히 수줍어 하는 동시 남에게 물건을 줄 때도 수줍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면 우리 경상도인들은 집에서 잔치를 했을 때 장만한 음식을 거리낌 없이 이웃 사람들에게 돌린다. 음식을 돌리면 당연히 받는 사람들이 좋아하리라 믿으며,
"이것 한번 먹어보이소" 하고 호기 있게 주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인은 그렇지 않다. 이 보잘것 없는 음식을 돌렸다가 괜히 남에게 폐를 입히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식성에 맞지도 않은 음식을 받아 거북하게 느끼지 않을까. 혹시 돌리는 동안 병균 같은 것이 섞여 식중독을 일으키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곤 그만두는게 낫겠다고 음식 돌리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미리 이웃에 돌릴 만큼 음식을 만들지 않는다. 이처럼 음식을 주기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마음씀이 섬세해서 푸짐한 선심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호기로운 경상도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깍쟁이로 보인다."

이병주, 행복어사전4, 한길사(이병주전집, 2006), 81-8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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