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0일 금요일

한글전용과 한자병용


1980년대만 하더라도 신문은 세로쓰기에 대부분의 중요한 단어들은 한자로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국민학교(네 저는 국민학교를 다닌 세대입니다) 입학전후로 읽을 거리에 목말랐던 저에게 하루에 한번씩 오는 신문은 꿩대신 닭같은 읽을거리였습니다. 1-2면에 나오는 기사는 글자가 크니 눈에 들어왔지만 3-4면 넘어가면서 나오는 사설과 정치경제 관련 기사는 지루하기 짝이 없어 빨리 뒤로 넘기고 증시상황표 뒤부터 나오는 스포츠기사와 사회면 기사를 탐독하곤 했습니다. 어린 눈에도 세상엔 벼라별 일도 많은 요지경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왠만큼 자주 나오는 한자가 어떤 음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의 한자실력은 갖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자공포증은 없어서 한자병용에 비교적 거부감이 없는 편에 속합니다.

그런데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지나면서 한글전용과 한자병용 문제가 불거졌고, 순우리말을 써서 일재의 잔재를 청산할 수 있다는 취지가 한글전용의 주된 논거 중의 하나였으며, 아직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재 잔재의 청산은 우리말이 분명이 존재하는데, 일제시대 일본어를 사용하면서 우리말에 스며들어온 단어들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일본이 근대시대 번역을 통해서 서양의 문물, 개념 및 사상을 받아들여 한자화한 것을 새로운 단어로 바꾸는 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면에서 한자병용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페이스북에서 알게 된 전직 외교부 공무원인 우동집 사장님의 글이 매우 설득력있어서 퍼왔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주권을 빼앗겼다가 다시 회복한 것은 그 자체로 불행한 일이고, 일제가 우리나라에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고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이 서양사상과 문물을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고 한자로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냈으며 심지어 중국에서도 일본이 번역한 한자어로 서양사상과 문물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점까지 애써 무시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슷한(동일한) 한자어를 쓰고 어문구조를 비슷하다는 것을 이용해서 해방후 40년이상 한국은 일본의 번역한 결과물과 산물들을 엑기스만 한국어로 번역하여 사용했고, 이것이 자신의 힘으로 근대화와 광복을 이루지 못했던 우리나라가 세계의 경제/문화 수준을 놀랍도록 빠르게 따라잡은 원동력 중에 하나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글전용이나 일재청산이라는 구호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과하게 되면 일본이 밉지만 일본이 해놓은 성과에 우리가 무임승차한 것을 잊어버리기 위한 것이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공과(功過)를 따질 때, 근대 서양의 사상과 문물과 관련된 용어를 한자화한 것을 공으로 인정하고, 한자병용의 좋은 점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약간 다른 관점에서 쓴 글로 first mover와 fast follower 참조). 위에서 신상목 사장님께서 예로 든 단어들은 굳이 다시 풀어서 쓸 이유가 없는 단어들입니다. 고속터미널도 "고터"로 줄여부르고 "ㅋㅋ"라는 자음으로 의사소통이 되는 시대에 한자어로 뜻을 함축해서 나타낼 수 있으며 수십년간 자리잡은 단어들을 일본에서 쓰던 것이라고 배척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가타카나나 히라가나로 표기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일본에서 수입하기 이전에 그 단어들은 "조선"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단어였기 때문에 그럴 필요성은 없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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