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8일 목요일

[책 소개] 비명을 찾아서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 문학과 지성사

어린이날, 부처님 오신날이 낀 연휴였는데, 특별히 준비성이 뛰어나지 않은 턱에 연휴에 놀러갈 계획을 잡아놓지 않아서 나들이 없이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골라잡은 책은 고종석 선생님이 스승이라고 하시는 복거일 씨의 초기 소설이었습니다. 원체 들어본 적은 많았으나, 그 제목이 우울해 보인다는 이유로, 폭망한 2009로스트메모리즈 라는 영화(장동건 주연)의 원작 소설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서 '영화가 망했는데 소설이라고 다르겠어?'라는 생각에, 1987년에 나온 소설을 굳이 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장편소설 치고는 그닥 두껍지 않은 분량, 고종석 선생님에게 영향을 미쳤고 영어공용화론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복거일이라는 분에 대한 뒤늦은 호기심으로 연휴 내내 오랜만에 책읽는 즐거움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제 감상평은 꽤나 괜찮은 소설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이미 20년도 넘은 소설의 내용이 지금 읽어도 별로 오래된 것 같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라는 점이 매우 놀랍습니다. 그 아이디어를 따서 시나리오를 만들었다는 2009로스트메모리즈(복거일씨는 당시 이 영화사를 상대로 아이디어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하였지만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를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장르로 보아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도 액션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그와 달리 주인공은 약간 비범한 정도의 알루미늄 생산회사 유부남 과장으로 직속 후배에게 연정을 품지만 끝내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머릿속으로 생각이 엄청 많은 시인에 불과합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실패하여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고 중국 일부까지 차지하면서 둘로 쪼개진 중국과 접경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말글을 잃어버린지 40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하는 주인공이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 모험을 떠나려는 찰라에 소설이 끝나고 말죠.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주인공이 정부로부터 합작투자 인허가를 받아내는 과정입니다. 로펌에 다닐 때 제가 했던 업무 중 외국환거래법상 기재부나 한국은행으로부터 인허가를 받는 것과 80년대와 2000년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우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복거일씨가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의 직업상 정부 부처 공무원들에게 인허가를 받는 일이 꽤 있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또한 일제에 병합된 조선을 이야기하면서도 내지에서 쿠데타가 벌어지는 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설 때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경험한 작가가 이를 비틀어 묘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하지만 작가가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었던 것은 우리 말글이 없어진 상태, 일제가 도서관에서 한글로 된 사전과 역사서도 모두 없애 버려 자료도 거의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 말글의 맥을 다시 찾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이 될 것인지 였습니다. 역사와 언어, 특히 일어와 우리 말에(업무의 내용상 다루어야 하는 영어까지) 상당한 지식과 경험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소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소설은 각 장을 가상의 소설이나 법령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거기에 맘에 드는 몇 구절을 옮겨 봅니다. 그 아이디어의 참신성을 비롯해 꽤나 흥미로운 점이 많은 소설로, 아직 안 읽으셨다면 한번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관료계급은 자신을 집권 계급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만듦으로서 연명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적으로 모호하며, 집권자가 누구인가 따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적국에 정복되면, 새 주인을 옛 주인을 섬겼던 것과 같은 충성심으로 섬긴다. 그들은 통치권력을 충성스럽게 섬김으로써 인민들 위에 군림하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한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경성, 쇼우와 62년(상), 문학과 지성사, 296-297면.

군사독재정권이 국내의 모든 반대자들을 힘으로 쉽사리 누를 수 있기 때문에 영속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정권 아래서 이득을 보는 자들의 기원에 지나지 않는다. 독재정권을 안정시키는 경직된 사회구조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결정적 약점을 안고 있다. 내부적으로 강력하고 안정된 듯이 보이는 정권들이 외부의 압력에 허망하도록 쉽사리 굴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양 열국의 개국요구 앞에 허둥대다가 무너진 도꾸가와 막부 정권이 그 좋은 예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상), 문학과 지성사, 322면.

정당하게 성립되지 않은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정권의 존재 자체가 사회의 도적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이다. 정치, 즉 권력의 배분행위는 어느 사회에서든지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원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차원에서 도덕적 질서가 이루어지길 바라겠는가?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상), 문학과지성사, 329면.

국가라는 배가 위기를 만나면, 국민들은 굳은 손길로 키를 잡을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배가 가야 할 목적지나 항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국민들은 전제적 통제가 분분한 논란들을 종식시키고 그럭저럭 배를 조종해서 험한 물결을 해져나가기를 기원한다. 그러나 옳은 항로를 발견하는 일은 굳은 손길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역사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하), 문학과지성사, 10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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